[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by 주디스 커
요양원에서 고요한 오후 시간을 보낸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할머니는 말한다.
‘아마 그들은 내가 홍차를 기다리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난 잠시 남편을 만나러 가요. 이제 헨리에게는 날개가 생겼고 천사가 허락해준 짧은 시간 동안 우린 즐거운 여행을 함께 해요.’
할머니는 죽은 남편과 다시 만나 커다란 공룡을 타고 정글을 누빈다. 새하얀 유니콘에 올라타 하늘을 날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고래가 이끄는 수상 스키를 탄다.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새들과 티타임을 즐긴다. 겁 많던 헨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차마 해보지 못했던 일이나 그동안 미루어왔던 일들을 멋지게 해낸다. 가끔은 둘이 함께 지나온 주름같이 깊은 시간을 회상해보기도 한다. 굉장한 모험이 끝날 때마다 할머니는 그에게 말한다.
‘내일 또 만나요.’
그림책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나라마다 시대별로 다양하다. 주디스 커의 그림책 [My Henry]에서는 먼저 떠나보낸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요양원에 홀로 남아 외롭고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틀림없을 텐데 분홍빛이 감도는 상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저 슬프지만은 않다.
바바라 쿠니의 [미스 럼피우스]에서는 한 사람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그려낸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던 그녀는 온 마을을 루핀 꽃의 보랏빛으로 물들인다.
사노 요코의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에서는 아흔다섯 살 할머니가 깨달은 삶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나이가 너무 많은 할머니라서 뛰어놀며 나비를 잡을 수도 없고, 개울에 첨벙거리며 들어가 물고기도 잡을 수 없다. 그런 할머니를 다시 다섯 살로 돌아가게 하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에서는 핵폭발과 방사능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조용히 기도하며 두 손을 잡고 잠드는 노부부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세기에 가까운 시간 전에 나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었던 그들은 [꽃할머니]가 된다. 꽃잎이 후드득 뜯기고 쾅쾅 밟히고 산산이 부서지고 짓이겨져 흩어졌지만, 파아란 제비꽃 닮은 꽃할머니로 다시 태어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총성이 울리던 날, 총알이 턱을 관통하여 평생을 얼굴에 무명천을 칭칭 감고 살아야 하는 [무명천 할머니]가 되었다.
수많은 할머니 그림책들을 보다가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온전한 자유의지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커다란 세계 속의 작은 입자들이 되어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어떤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바람과 느슨한 나를 슬쩍 잡아당기고 싶은 마음을 절반씩 담고 있는 물음이다. 할아버지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남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응수한다. 지금은 끝이 안 보이는 시간들을 구름처럼 밟으며 살고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시간이 조금 더 팽팽해진다.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지금처럼 온수가 콸콸 나오는, 관리비를 꾸준히 내는 아파트에 살 거라고 말한다. 나무 보일러도 주택도 싫지만 말벌을 잡고 달콤한 아카시아 꿀을 만들며 양봉을 하는 노년은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도서관에 가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꾸준히 대출과 반납을 하는 루틴을 가지고 대출 기간만큼의 시간을 채워나가며, 돋보기와 큰 글자 도서에 의존해야 하겠지만 보고 싶은 책을 큰 염려 없이 볼 수 있는 건강과 굴곡 없는 삶이면 좋겠다고. 그때도 지금처럼 어린이 자료실을 자주 찾는, 어린이의 마음에 가까운 할머니면 좋겠다.
마주 앉아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당신과 오래도록 함께라면 좋을 것 같다고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때론 작고 못나고 가냘픈 것들이지만 둥글게 마주하고 있으면 완전한 하나가 되는 듯한 그 가득참이 꽤 멋지다.
그동안 종이에 되는대로 적어 제출했던 장래 희망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원색에 가까운 바람이다. 점과 선을 이어 계단오르듯 자라나던 시절과는 다르게 어느 순간부터는 무사히 착지점을 찾는 패러글라이딩의 마음으로, 큰 동요와 마찰 없이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매끄럽게 나이 들고 싶다는 바람이 차곡차곡 쌓인다.
오늘은 세상에 없는 그림책을 오랫동안 생각해본다. 나와 남편이 주인공인 그림책, 그들이 어떤 시간으로 나아갈지, 그 끝에서 그들은 얼마나 가느다랗게 웃을 수 있을지, 마침표라고 생각한 그 점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뒷표지를 만날 수 있을지, 마침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된 그들의 얼굴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