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나니 이제는 딱히 재미있는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바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일 처리를 하고, 많은 일을 해 나가고 있다. 항상 쉬지 않고 바쁘게 지내고 있다. 어디를 나간다거나, 무언가를 한다거나, 새로운 것을 배운다거나. 주말이면 꽃구경하러 다니고, 가끔 시키지도 않은 업무를 자발적으로 하기도 하고, 자기 계발을 위해 연수도 찾아 듣는다. 가만히 앉아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이 되는 생각이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 10년, 20년 전 말실수나 어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을 떠올리며 혹시 내가 잘못한 일은 없는지 복기한다.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한 바쁨은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바쁨이다. 나를 괴롭히는 잡생각 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한 바쁨이다.
급한 성격 덕에 하고자 하는 일에 추진력이 남다르다. ‘우리 언제 같이 밥 먹자.’라는 말에 바로 언제 만날지 투표부터 만들어 공유한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날짜를 정했다면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리스트를 만들어 상대에게 보낸다. 약속 장소를 빨리 정하기 위해서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으면 답답하다. 무언가를 정하지 않고 뭉그적거리거나, 확정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다. 일이 마냥 뜬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꼴을 못 보겠다. 당장 끈을 매달아 땅에 고정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내향인이지만 모임의 리더 역할을 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는 편이다. 외향인이냐고 오해받을 정도다. 분명 나는 I인 사람인데, 네가 무슨 I냐며 확신의 E라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면 짜증 난다. 네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냐? 난 정말 구석탱이에 앉아 조용히 있고 싶은 사람인데 말이다. 그냥 성격이 급할 뿐인데.
나 자신과의 약속은 자주 어기지만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어기지 않는 편이다. 아파도 어지간해서는 취소하지 않는다. 만남을 위해 시간을 비워 뒀을 상대에게 민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밤새 펄펄 열이 났으면서 약속 시간 전 병원에 들러 링거를 맞고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간 적도 있다. 웬만해서는 전화를 먼저 끊지도 않는다. 정말 끊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상대가 끊을 때까지 기다린다. 새벽에 들어와도 댕댕이 산책을 빼놓지 않으며, 출근 외의 시간은 강아지와 함께하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교체하던 한 달 동안도 18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산책했다. 항상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고 내가 져야 하는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딱히 열심히 살고 싶지 않으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내가 나의 자랑이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는 게 나의 자랑이다.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지만, 급한 성격 때문에 나서서 굳이 일을 하는 내가 자랑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가 자랑이다.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지려고 애쓰는 내가 바로 자랑이다.
내가 자랑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