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할머니랑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기 저기~
쌔쌔쌔를 가르쳐주었던 할머니, 누룽지를 뭉쳐 한 손에 쥐어주던 할머니, 오늘 하루 있었던 얘기를 함께 하곤 했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와 더 이상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그러더라도 할머니와 함께하고 싶을 때,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아래의 세 영화는 모두 필자가 할머니와 함께 본 영화이며, 필자의 할머니의 감상평도 함께 넣어보았다.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 보아도 좋다.
아흔셋,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
더 이상 돌볼 자식도 손자도 없는 할머니는 그렇게 늙어간다. 내가 자라고 성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릴수록 더 작아지고 더 약해져 가는 나의 할머니. 그런 당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감독은 할머니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기 시작한다. 할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우리는 할머니를 기억할 준비라도 필요하다.
할머니, 내가 영화 열심히 찍을 테니까 다 보고 돌아가셔. 그전에 돌아가시면 안 돼
필자는 현재 24세, 할머니는 87세이시다. 필자가 자라 갈수록, 할머니가 작아져가는 게 보인다. 늘 기억하던 모습은 7살 때 할머니랑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 시합했던, 할머니한테 질까 봐 전속력으로 뛰어야 했던 그때 그 모습인데 할머니는 눈에 띄게 약해져 간다. 내가 기억하던 70대의 건강한 할머니를 보고 싶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만, 그러면 어리고 약할 때로 돌아가는 게 싫어 되돌릴 수 없는 역설 속에서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더 이상 돌볼 자식도, 손주도 없는 할머니.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의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가 같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돌볼 대상이 없어도 할머니가 스스로를 잘 돌보는 것, 할머니 자신만의 삶을 가꾸어가는 것. 다행히 나의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잘 가꾸어가시는 듯하다.
우리 할머니의 평 : 아이고 저 할머니 오래 살 겄다~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은 죄인이던 시절, 본처 막이는 후처 춘희를 들인다.
아들만 낳으믄 보내버릴라 했제
....
차마 그랄 수가 없더라. 그랄 수가 없어..
아들만 낳으면 돌려보내려던 막이, 차마 그럴 수가 없어 동거한 지 어언 46년째.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향년 90대인 막이와 70대가 되어버린 춘희. 막이는 지적장애를 가진 70대 노인 춘희가 혼자 남을 것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다급해진 막이는 자신 없이도 춘희가 혼자 살 수 있도록 돈 세는 법 등을 가르쳐보지만 쉽지 않다.
노인은 일상에서 죽음을 고민하고 생각하며 걱정하는 존재들이다. 나의 할머니가 그렇고 춘희 할머니와 막이 할머니가 그렇다. 내가 당장 내년의 삶을 어떻게 살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는 동안 할머니는 아프지 않고 자다가 죽을 수 있기를, 자식들에게 짐 되지 않게 일찍 죽기를, 그러나 사실은 오래 살아 '너희들'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나의 일상이 내일과 맞닿아 있다면, 할머니의 일상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죽음을 고민하는 낯선 할머니들의 일상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 할머니의 감상평 : 첫째 마누라가 참 마음이 좋은 여자여
89세 소녀감성 강계열 할머니와 98세 장난꾸러기 조병만 할아버지는 어딜 가든 커플 한복을 맞춰 입고 두 손을 꼭 잡고 걷는 76년째 연인이다. 겨울엔 눈싸움을, 여름엔 물장구를 치는 백발의 연인, 그러나 할아버지가 귀여워하던 강아지 '꼬마'를 떠나보내고 할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약해져 간다. 백발의 연인은 그렇게 맞을 수 없는 이별을 준비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흥행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백발의 연인의 변치 않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게 의 할머니와 영화를 볼 때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이유였다. 나의 할머니는 18살 때 겪었던 한국전쟁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했다. 3년간 겪었던 전쟁보다 할아버지의 가정폭력이 할머니의 마음과 몸에 더 큰 상흔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 할머니가 두 노인의 변치 않는 사랑을 보아야 했던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염려하는 게 진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나의 할머니는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 할머니의 감상평 : 에고 나는 그 노인네 죽은 게 안됐다(훌쩍)
마지막으로 지난겨울 눈 오던 날에 썼던 필자의 에세이를 함께 담아본다.
<눈 오는 날>
내가 살던 단양은 눈이 자주 왔었다. 어릴 땐 눈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서 눈이 적게 온다고 느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눈이 많이 왔던 것 같다.
겨울방학쯤이었나, 곤하게 잠을 자고 있으면 참기름처럼 고소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단비야이. 일어나래이. 밖에 누운이 왔어!"
평소엔 할머니가 깨워도 들은 체도 않고 쿨쿨 자던 나였는데, 그때의 나는 내복 차림으로 한달음에 달려 나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그럼 화-하고 포근하고 하얀 눈이 나를 맞았다. 온 세상은 새하얀 이불을 덮고 잠자는 것처럼 고즈넉하게 반짝였다. 눈 오던 날은 해가 화창했던 것 같은데, 새하얀 눈들은 그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겨울은 눈이라는 이불을 덮고 날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 날 유난히 할머니가 들떴던 모습이 기억난다. 마음이 들뜬 할머니는 하회탈처럼 활짝 웃었다. 눈은 할머니의 마음에 풍선을 불었는지 할머니의 마음이 가볍게 부풀어올랐다. 지금도 작고 그때도 작았던 할머니는 다행히 날아가지 않았고 대신 새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달려 나왔다. 그리고 눈사람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꼬마였던 나랑 동생은 영차영차 눈덩이를 굴려 몸집보다 컸을 눈덩이를 만들어냈다. 2개인가 3개까지 눈사람을 완성하고 뿌듯해하는데, 할머니가 말했다.
"코! 눈사람에 코가 빠졌다!"
할머니는 눈사람 코에 뭐를 넣을까 고민하다 숯을 가져와 코로 만들었다. 사실 눈사람에 코를 만드니 훨씬 못났지만, 나는 행복한 할머니가 마냥 좋아서 이쁘다고 손뼉 쳤다. 그때 그 눈사람들은 나, 동생, 우리 할머니 이렇게 셋의 행복한 모습을 다 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