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평: 남성 작가가 자신의 위치에서 젠더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한 첫발. 섣불리 피해자 여성의 편에 서기보다 자신이 속한 남성집단을 먼저 비판할 줄 아는, '남성'이라는 위치성에서 출발한 작품.
'한남'은 어떻게 생겼을까? 둥글넙적한 얼굴에 뿔테를 쓰고 몰카를 포르노로 소비하는 괴물화된 존재? 나는 경고하고 싶다. 괴물화된 '한남'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일상화된 성폭력을 설명할 수 없다. 가해자를 괴물화된 '한남'으로 상상하는 순간, 조두순은 단죄할 수 있지만, 안희정은 단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남교사, 평범 한남교사
이 소설은 윤리를 가르치는 남교사의 독백이다. 정직하고 깨어있는 남교사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설교하기 시작한다. 이기적이게 살지 않을 것, 공동체에 헌신할 것... 우리가 이상으로서 필히 알지만 실천하지 않기에 결국 이상으로 남는 것들은 이토록 '윤리적인' 남교사를 통해 흘러나온다. 꽤 깨어있고 생각보다 탈권위적이며 까딱거리며 고개를 흔들어줄만하다. 그러나 그는 묘하게 위선적이며 결국 위선적이다.
연주였다.
그 학생의 이름은 연주였다. 늘 수업시간에 졸곤 하던 아이, 술집에 다닌다고 소문이 돌던 아이,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한 몸을 두고 남교사들의 주적거림에 오르내리던 아이. 모두 연주였다. 그리고 분위기를 깨기 싫어 그 주적거림을 듣고만 있던 교사는, 그 남교사였다.
술집에 다닌다고 소문이 돌던 연주가 일하는 곳은 동태탕을 파는 곳이었다. 어린 나이에 식당에서 일하며 생계를 벌고 그래서 수업에서 졸아야 했으며 소문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연주가 불쌍했다고. 남교사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런 연주에게 '함께'를 알려주기 위해 밤길을 걸어 집에 데려다줄 수 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사실 자긴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남교사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 후 오랫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아 퇴학 처리되었던 연주가 배가 부른 채 나타나 "사랑했다"고 말해버려서 피해자가 되버린 건 오히려 자신이라고, 남교사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런 그의 '계속해서 말하기'는 그가 침묵하고 동조했던 주적거림의 일부가 되어 허공을 떠다닐 뿐이다.
작가는 「고두」를 쓰는 동안 연희문화창작촌에서 입주했다고 덧붙였다.
남교사는 평범한 남성이다. 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며 가족을 부양하고 가끔 아내에게 자신을 짝사랑했던 여학생이 있었다고 농담하며 세상의 선의를 믿는 남성이다. 그러나 남교사는 학생에 대한 남교사들의 언어 성폭력에 침묵으로 동조했으며, 그와의 관계로 인해 '연주'가 학교를 떠나야만 했을 때 계속해서 교직에 근무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연주가 식당에서 일을 하는 것을 두고 술집을 다닌다느니 모텔을 다닌다느니 너무 쉽게 만들어져버린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남교사는 고결한 명예를 유지하며 평범한 남성으로 살아간다. 나는 이 소설이 미투 이후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소리쳐 묻는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