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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얀 Dec 27. 2023

미국에서 아랍어를 배운 한국인

 '한국어-아랍어 동시통역사가 되어보자'는 목표를 정했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 거기서부터 모든 게 새로 시작되어야 했다. 접해본 적도 없는 언어인 아랍어를 배우는 건 당연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노력을 내가 이미 아는 다른 외국어에 투자했다면 그걸 마스터했겠다. 지금이라도 다른 언어를 배울까?' 하는 생각을 고비마다 수차례 했다.


 '아랍어 제대로 배워보자'는 부푼 꿈을 안고 아랍어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약간(?) 충격받았던 사실은, 아랍어과에는 아랍어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오는 학생들보다 점수에 맞춰 온 학생들이 더 많았단 것이다. 다시 말해, 본인에게 더 만족스런 선택지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아랍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동기들이 많았다.

 

 오해는 마시길. 우리 과를 폄하할 생각도 없고, 그런 동기들의 마음도 십분 이해하니까.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랍어 잘해서 통역사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던 나조차도 '다른 거 해볼까..' 하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우선 아랍어는 너무 낯설었다. 그래도 나는 아랍어를 배우고 싶어서 EBS 강의로 알파벳 정도는 다 떼고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온 동기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원어민이 몇 있었다. 나와 다른 동기들이 걸음마를 할 때 날아다니는 친구들. 말 그대로 넘사벽이었다. 그렇지만 애초에 비교조차 불가한 이 친구들을 부러워할 시간에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했다. 동기들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꿈이 있다는 게 참 큰 힘이 됐다. 체질적으로 알쓰(..)인 나는 인싸가 되려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꼈고, 억지로 술을 마시느니 아싸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런 결심 때문에 1학년 1학기 수강신청이 폭망..이었다. 시간표를 최대한 이리저리 맞춰 봤는데도 전공필수 과목을 두 과목밖에 신청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전필 과목들은 1학기-2학기가 세트였다. 다시 말해, 1학기를 놓치면 2학기 때에도 듣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다른 동기들이 한 학기에 4과목씩 1년에 아랍어 8과목을 들을 때, 나는 총 4과목밖에 못 듣게 됐다.


 이런 애로사항이 있었음에도, 공강 시간에 도서관에 가며 아랍어 기초를 다질 힘을 준 게 바로 내 꿈이었다. 꿈이 있으니, 중간이나 기말고사 때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고 손을 놓아버리지 않았고, 시험이 끝나고도 아랍어 만화 동영상을 찾아보는 등(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의 노력을 자발적으로 하게 되었다. 틈틈이 영어 공부도 놓지 않았고, 1학년 2학기땐 갑자기 영국 영어에 꽂혀서 IELTS 시험도 봤다. 이때 따 놓은 점수 덕에 겨울방학 때 학교에서 선발하는 '자유경쟁(전공언어에 상관없이 원하는 국가와 대학을 택할 수 있는 제도)' 교환학생에 선발되어, 2학년 2학기부터는 미국 아칸소 대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두드리는 나에게, 기회가 문을 열어 주었다.


 



 1학년 때 들은 아랍어 수업이 적어 기초가 부족한 나였지만, 3학년 때 한국에 돌아오니 수업에서 상위권쯤 되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이게 다 미국에서 들은 아랍어 수업 덕이었던 것 같다. 아칸소 대학교의 아드난 교수님은 레바논 출신으로, 아랍어와 프랑스어 원어민이고 영어도 당연히 아주 유창했다. 그리고 수업 준비를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물론 경력도 오래되셨고), 그 어려운(불규칙한) 아랍어 문법을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외우게끔 해주셨다. 미국에 아랍어 사교육 시장이 있었다면 일타강사가 되고도 남으셨을 거다. 수업 도중 아랍어권 노벨 문학상 후보의 전화를 받으시기도 했다. 그 작가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신 분이어서.


 아칸소 대학교에선 이런 분의 수업을 매일매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언어를 배울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매일매일 조금씩' 하는 꾸준함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외국어 수업이 6학점짜리(월/수/금은 1시간 반씩, 화/목은 50분씩)로 되어 있었다. 거기다 매 수업마다 저널(일기..)을 써 가야 했다. 물론 첨삭도 해주셨다. 문화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그리고 대학 시스템적으로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미국 학생들이 아랍어를 배우기에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나도 아칸소 대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아랍어를 더더더더더욱 잘하게 되었을 것 같다.


 본인의 오피스 아워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슬퍼하시던 아드난 교수님. 와서 아랍어를 소리 내어 읽기라도 하라고, 그러면 자기가 조언해 줄 테니 제발 오라고 하셨던 분. 미국인 기준으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인데 너는 그중에서 두 가지나 하니까 얼마나 대단하냐고 하며 나를 치켜세워 주시고, 본인이 읽으시는 신문에 레바논 동명부대 기사가 실렸다며 그 아랍어 기사를 프린트해 주셨던 교수님.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꽤 오랫동안, 대학원에 가고 취업을 한 뒤에도 우리나라 '스승의 날'이면 나는 그분이 먼저 떠올라 감사의 메일을 보내곤 했다.


  



 어쨌든 미국에서의 경험 덕분에(수업 외적으로도, 내가 아랍어 공부하는 걸 보고 먼저 관심을 보인 아랍인 친구들도 나를 정말 많이 도와줬다) 내 아랍어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한국에 돌아와서 수업을 들을 때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결국 나는 아랍어권 국가에 가 본 건 아니었으니까. 일상에서도 아랍어만 쓰는 나라에 가 보고 싶었다. 그러다 '쿠웨이트'라는 걸프만의 작은 나라(하지만 석유 부국)에서 매년 정부장학생을 선발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지원해서 덜컥 합격했다. 1년의 학점 교류 기회는 미국에서 다 써버렸기에, 쿠웨이트는 휴학을 하고 가야 했다. 당연히 휴학해야지! 통역사가 되는 시기가 1년쯤 늦어진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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