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이 대체 뭐가 중요하냐고!
12월 내내 첫째의 최애 책은 <산타클로스와 산타 마을의 일 년>이라는 책이었다. 첫째가 올해 산타할아버지에 관심을 좀 많이 갖길래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나오는 책을 사 줬는데, 말 그대로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잠자리 독서로도 이 책을 읽고, 아침에도 또 읽고, 낮에도 읽고..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요정이나 산타 할아버지와 적극 교감(?)하고 소통(??)하는 첫째지만, 요정들이 선물 포장하는 부분을 특히 좋아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온갖 장난감이 넘쳐 나는 창고에서는 행복에 겨운 요정들의 와글거리는 소리가 넘쳐 나. -31쪽
음.. 어제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요정 마을에는 아주 큰 포장지가 많고 장난감들이 모두 네모 반듯한 상자 안에 들어 있나 보다.
시작은 창대(?)했다. 남편과 나, 우리 두 산타의 대리인들은 아주 들뜬 마음으로 숨겨놨던 택배를 뜯었다. 벌써 세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지만, 제대로 된 선물을 받는 건 처음인 첫째가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며. 기관 생활도 하지 않아 작년과 재작년에는 선물도 없이 얼렁뚱땅 넘어갔었지만, 올해는 마트나 가게의 크리스마스 마케팅의 일환으로 보이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첫째가 먼저 관심을 가졌다. 내가 읽어준 책들에서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는 동물들과 아이들이 등장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비로소 산타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기 시작한 첫째는 받고 싶은 선물을 바로 정했다. 인형 유모차!
지금까지는 애착 인형들을 전부 예전에 본인이, 얼마 전까진 동생이 앉던 바퀴 있는 범보 의자에 태우고 다녔다. 그게 유모차라면서. 그러다 어딘가에서 ‘인형 유모차’가 있다는 걸 본 날부터 인형 유모차는 빠르게 첫째의 위시리스트에 올랐고, 머잖아 1순위가 되었다. 어찌나 갖고 싶었는지 산타 할아버지에게 “인형 유모차 갖다 주세요”라는 편지도 세 번이나 썼다. 한 번은 집에서(본인이 쓴 상형문자 사이사이에 내가 대필해 줬다), 한 번은 마트의 소원 트리에(이번에도 내가 대필), 마지막 한 번은 수목원의 소원 트리에(‘내년 소원’을 쓰는 건데 이게 확실하냐고 재차 확인했고, 남편이 대필). 그래서 나란 산타가 크리스마스 2주 전쯤 괜찮아 보이는 인형 유모차를 주문했고, 남편 산타는 이브에 조립을 맡기로 했다.
택배 언박싱을 할 때까진 괜찮았는데, 조립을 다 해놓고 보니 우리 생각보다 유모차가 더 컸다. 비상사태! 얼마 전 마련해 둔 포장지가 모자랄 것 같았다. “휴.. 부모 되기 힘드네”하는 탄식과 함께 남편은 유모차를 해체해서 다시 박스에 넣고, 그걸 포장하자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첫째가 내일 이걸 보자마자 당장 끌고 싶어할 텐데! 오늘 잘 때도 ‘내일 일어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가져오셨겠지..?’하며 잠든 앤데.. 조립하는데 생각보다 시간도 좀 걸렸는데, 내일 조립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면 김새지 않을까? 굳이 해체할 필요가 있어? 그냥 이 상태 그대로, 포장지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유모차 바퀴 아래 빼고 나머지 부분들에만 이어 붙여서 감싸면 되지.”
그러자 남편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황당한 소리는 태어나 처음 듣는단 말은, 굳이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눈빛에서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본인에게 이렇게 거적때기처럼 포장을 해서 주면 정말 실망했을 거란다. 우리 아이의 첫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렇게 주고 싶지 않단다. 우리 아이는 포장에도 좀 신경을 쓰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단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 않냐." 한마디 한마디가 나와는 아주 상극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근데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이란 말도 있다. 내가 예전에 힘들어했던 상사 알지 않냐(남편과 나는 입사 동기다). 그 사람은 형식과 겉치레를(그리고 남의 눈을) 제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다 못해 존경했던 부장님도 알지 않냐. 그 분은 딱 나처럼 알맹이가 제일 중요하다는 분이었다…’
나는 입사 면접 때도 ppt를 꾸미기보단 내용에 훨씬 신경 썼었다. 덕분인지 소위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했지만, 얼마 뒤 이 회사에서 중요한 건 형식(보고 양식, 주간 업무 등)과 겉치레(결재판, 과한 의전 등)이라는 걸 깨닫고 적잖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그 부장님은 나의 등불 같은 분이셨다. 본인도 몇십 년 전 입사했을 때 회의감이 들었는데 나는 어떻겠냐(어떻게 아셨지..?) 하시던 분. ‘군대’라 불릴 정도로 상명하달, 전형적인 탑다운 방식으로 운영되는 위계에서 살아남은 분이지만, 윗 상사(나를 힘들게 했던 그분)에게 “이렇게 본인 말씀만 하실 거면 회의를 왜 합니까? 이게 무슨 회읩니까?”라고 할 줄 아시는 분(내 두 귀로 들은 건데, 드라마 보는 줄 알았다). 막내인 내가 전시행정에 동원돼 잡일에 시달릴 때 중간 상사들에게 “이런 겉치레가 왜 필요하나?”하고 커버 쳐 주시던 분.
30개월 된 아기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을 하다 이런 기억까지 끄집어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당시 나의 이너써클(?) 중 한 사람으로서 내가 고민과 눈물로 지새운 나날들을 아는 남편은 결국 절충안을 내놓았다. 나에겐 제대로 된 포장보다 ‘첫째가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유모차를 끌 수 있는 경험’이 더 중요하지만, 본인에겐 ‘첫째가 언박싱의 설렘과 즐거움까지 누리는 것’이 중요하니.. 일단 유모차 박스만 포장해 놓고, 첫째가 박스를 다 뜯으면 조립된 유모차를 가져와서 주자는 것이었다. 음, 괜찮은데? 사실 꽤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입사 동기였던 시절에도 남편이 보여준 이런 해결사의 면모에 내가 반했었지.. 하는 생각도 들고(음..??!!).
나도 안다. 아이에게 예쁜 것만 주고 싶은 남편의 마음을. 나라고 왜 안 그렇겠는가. 나도 기왕이면 예쁘고 반듯하게 포장된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이에게 안겨 주고 싶다. 그런데 네모 반듯한 포장을 위해서 한 달, 아니 사실상 몇 달을 기다려 온 인형 유모차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밀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버리고 싶지 않았다. 포장을 아예 안 하겠단 것도 아니고, 엉성하게나마 포장지를 이어 붙여 유모차를 감쌀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반듯한 포장을 위해서 이미 조립해 놓은 걸 해체하고 내일 다시 조립하는 건 얼마나 비효율(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적인가? 또 그거 조립하는 동안 주변을 맴돌고 칭얼거릴 둘째는 어떻게 감당할 건가?(사실 이것도 싫었다..)
결국 첫째는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빈 박스 포장을 열심히 뜯었고(이때 보니 엉성하고 뜯기 쉬운 포장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건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갑자기 소파 뒤에서부터 굴러와 자기 옆에 서 있는 예쁜 인형 유모차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포장이든 알맹이든 뭣이 중헌디. 네가 기쁘고 좋으면 됐지. 이렇게 초보 엄빠는 처음으로 제대로 맡아본 산타의 대리인 임무를 완수했다. X-mas Mission Accomp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