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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기회 Dec 19. 2024

익숙한 일상은 편하면서 권태롭기도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

지난 늦여름 동거인과 함께 살기 시작하며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사는 곳이 변하자 내 일상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함께 사는 동거인이 생겼다는 거. 동거인은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우리는 다툼 없이 서로의 존재에 고마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원룸에 살면서 늘 꿈꾸던 아담한 거실과 식탁이 생겼다. 거실 중앙에 놓인 식탁에서 밥도 먹고, 노트북도 하고, 책도 읽는다. 또 내 방, 침실이 생겼다. 이제는 누워있을 때 부엌도 세탁기도 보이지 않는다. 삶의 질이 더 높아졌다.


집 밖으로 나와서는 산책할 때 걷는 길이 달라졌고 새로 발견한 동네 카페와 맛집이 생겼다. 새로운 곳을 발견하면 동거인에게 여기 봐봐 분위기가 넘 좋아 보여, 우리 다음에 가자, 이 골목에 이런 카페가 있는 줄 알았어? 라며 마구마구 정보를 공유했다.


이사 온 동네가 마음에 들고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일상이 기대되어 '사는 곳이 변하자 생활이 달라졌다.'라는 글도 적었다. 당시 나의 마음은 새로운 변화를 마주하곤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이 글을 적은 지 벌써 3개월의 시간이 지났고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나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삶이 변하려면 집이 아니라 내가, 나의 마음이, 나의 의지가 바뀌어야 하나 보다.



아니다, 달라졌었는데 그 생활에 또 금방 또 익숙해졌다. 그리고 조금은 게을러졌다. 거실 식탁에서 책도 읽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지금은 거실 식탁 의자에 외투와 입었던 옷들이 켜켜이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집 근처에 성북천이 있어서 산책을 자주 다니려고 했는데 날씨가 추워지고 한 번도 산책을 나간 적이 없다. 퇴근하면 집 안으로, 내 방으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기 바쁘다. 혹시 우리 집 가훈은 이불 밖은 위험해?


모든 관계와 생활이 그렇듯 낯설었던 풍경이 익숙해지고 내 생활에도 안정감이 찾아오자 조금은 나태하고 편안하게 지낸다. 그래도 시간이 잘 간다. 시간의 함정은 뭘 해도 시간이 빨리 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빨리 가는 것 아닐까? 뭐든 그 처음이 여러 번 반복되면 맨 처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기가 어렵다. 그래서 처음 하는 경험과 처음 품었던 마음이 소중한 것 같다.


어느 날엔 동거인에게 '브런치 매거진 연재를 그만둬야 할까 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거인과 같이 사는 삶이 물 흐르듯 지나서 딱히 쓸 글감이 없다. 같이 살아보니 고민되는 지점이나 갈등요소 없이 정말 딱 맞는 퍼즐처럼 살고 있으니 글로 적을 에피소드가 없다. 아마 동거와 결혼의 다른 점이 동거는 느슨하게 공간을 공유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집에서도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낸다.


그동안엔 동거인이 학위논문 때문에 집이 아닌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고, 나도 최근에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마음을 쓰느라 서로를 신경 쓸 에너지가 없었다. 그저 집에서 마주치면 오 반가운 동지여! 하고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볼 뿐이다.


기쁘게도 동거인은 석사학위 논문을 통과하여 우리 집에서 (단둘이지만) 가장 똑똑한 척척석사가 되었고, 슬프게도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한 집안에 기쁨과 슬픔이 함께 날아오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익숙한 삶이 편하고 좋긴 하다. 내 하루의, 일주일의 루틴도 정해져 있다. 복세편살이란 말처럼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면 장땡 아닌가, 스트레스 덜 받고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그래서 이렇게 새로울 거 없이도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라고 이 글을 마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보다 '그럼에도'가 좋다. 지금의 일상이 편하고 좋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겠습니다. 정치뉴스를 보면 스트레스받고 외면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겠습니다. 집에 오면 눕고 싶고 귀찮지만 그럼에도 운동을 가겠습니다. (먹고 싶지만 그럼에도 참겠습니다는 참 어렵다.) 내 일상에 여러 그럼에도를 붙여서 변주를 만들고 싶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은 내일은 싫다. 재미가 없다.


아직은 30대니까, 나는 나만 책임지면 되니까,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으니까. 내 마음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그럼에도'의 마음으로 여러 경험을 하고 싶다. 나의 세계를 다양한 모양으로, 다채로운 빛깔로 확장하고 싶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은 고요한 호수가 아니라 계속 흐르는 강물이고 싶다. 힘든 일이 싫긴 하지만 파도가 있는 바다가 좋다. 호수는 재미가 없는 거 같다. 그냥 멋진 서퍼처럼 내 인생의 파도를 탈래. 갑자기 호수, 강물, 바다의 예시를 든 건 나의 사주가 물이라서 그렇다. 정말 또 어이없죠?


요새 괜히 신년운세를 보고 싶어서 마음이 들썩이는데 물은 한 곳에 고여있으면 썩는다. 흘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역마살인지? 물은 담는 것에 따라서 모양이 바뀐다. 물처럼 흐르며 유연하게 더 좋은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늘 새롭게 배우고 경험하는 삶을 꿈꾼다.


한강 노을과 윤슬
바다와 일출


사는 곳이 변해도 그 변화는 금방 내 일상이 되니까 익숙해지고 권태로움을 느끼게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변하려는 마음가짐과 일상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시선인 거 같다. 특히 회사원인 나의 하루는 정말 비슷하고 당장 일주일 뒤에도 나는 같은 시간에 똑같은 모습일 거 같기에, 다채로운 삶을 위해 스스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생각하는 연말을 보내야겠다. 치열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책을 읽으면서, 걷다가, 느슨하게 떠올려 보는 것이다.


요새는 우연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좋다. 그런 우연함을 자주 발견할 수 있도록 내 마음과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야겠다.




말이 또 길어졌지만 이번주 매거진 연재를 할 수 있어 기쁘다. 친구와 동거하는 일상이 익숙하고 편안해서 글 쓸 소재가 고갈이다. 앞으로는 매거진의 주제를 함께 사는 여자들의 일과 사랑, 취미와 관심사 등 다양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우리가 저녁 먹으며 이야기하는 주제로 펼쳐지는 생각의 지평을 브런치에 담아봐야겠다.



책 제목은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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