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주택에 살아보니 웃픈 일상
친구랑 둘이 동거하는 여둘살이 집은 오래된 주택이다. 서울에는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가 워낙 많지만,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지나갈 때마다 신기하다. 시범 아파트라니?!) 우리 집도 꽤나 나이가 많다. 얼마나 오래됐냐면, 우리 집 임대인은 50년대생 할머니이신데, 할머니도 이 집을 상속받으셨다고 한다! 비록 외관은 빨간색 벽돌 주택이지만 내부는 2년 전에 올화이트 인테리어로 수리하여 깨끗하다.
또 오래된 주택의 장점으로 집 구조가 잘 빠져서 둘이 살기에 충분히 넓다. 넓고 깨끗한데 더 고민할 이유가 있나? 라는 생각으로 (집이 오래된 건 별로 염두하지 않고) 바로 부동산 계약을 했다. 하지만 한국말은 역시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오래된 집에 직접 살아보니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있었다. 올화이트 인테리어에 숨겨진 이 집의 비밀.
비밀 1. 속이 헐었니? 왜 녹물을 흘리니..
이사 첫날 손을 씻으려고 세면대 물을 트니 녹물이 나왔다. 혹시 여기가 동남아 인가??? 집에서 녹물이 나온다고???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동남아 여행 갈 때 샤워기 필터가 필수품이라는데,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집에 살면서 여행 다니는 기분을 이렇게 느낀다고?) 찾아보니 오래된 집은 수도관이 녹슬어서 녹물이 흔하게 나온다고 한다. 마음을 진정하고 (순간 부동산 사기 당했나 싶었다) 물을 한참 틀어놓으니 묵은 녹물이 다 나온 건지 깨끗한 물이 나오긴 했다. 그래도 찝찝한 기분은 씻기지 않았다.
우리는 당장 쿠팡에서 필터를 주문해서 세면대, 샤워기, 주방 수전에 모두 필터를 끼웠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소중한 피부를 지키기 위해 샤워기 필터를 정기적으로 갈아주고 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놀라게 한 녹물 문제는 필터기 교체라는 방법으로 비교적 쉽게 해결했다. 그치만 여전히 필터가 더러워지는 걸 보면 오싹한 기분이 든다.
비밀 2. 뜨거워지면 단수하는 너, 차갑다
이 비밀은 현재 진행형인데 (아직 해결방안을 모르겠다)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 (이유를 모르겠다) 샤워기를 온수 방향으로 돌리면 대학생 시절 유럽여행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 호스텔 샤워실에서 따뜻한 물로 씻으려고 하면 물이 쪼르르 나왔다. 10년 전 그땐 이게 다 유럽여행의 추억이고 물이 귀한 유럽이니까 이해를 했지만, 나는 집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데! 매일 이런다고?
샤워기의 찬물은 콸콸콸 잘 나오는데 수도꼭지를 온수 방향으로 돌리면 그땐 수압이 급격히 낮아진다. 그러다가 뚝- 뜨거운 물이 안 나와서 샤워할 때마다 당황스럽다. 같은 수도관으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샤워기만 온수 수압이 약하고, 세면대에선 또 온수가 잘 나온다. (반전) 상황이 이러니 세면대의 뜨거운 물을 바가지에 담아서 씻어야 할지 고민이다. (이게 무슨 산골 소녀의 바가지 같은 말이냐고요) 그래도 여름이라 날이 더워서 아직은 찬물로 샤워해도 괜찮은데 이제 겨울이 걱정이다. 겨울에는 부디 이 문제가 해결되어 따뜻한 물에 온몸을 맡기고 싶다. 후다닥 샤워 말고 느긋하게- 내가 좋아하는 샤워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비밀 3. 우리 집 주소는 9와 4분의 3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단독주택은 층마다 가구가 하나씩 있어서 그런지 호수가 따로 없다. 그래서 상세 주소가 그냥 층수이다. (1층, 2층) 그런데 건물에 반지층이 있다면, 그 반지층이 꼭 1층처럼 보인다면 이게 참 애매해다. 처음 집을 보러 갔을 때 나는 우리 집이 2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부동산 계약을 할 때 보니 건축물대장상 우리 집은 1층이었다. (심지어 우리 집은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도!) 내가 1층이라고 착각한 집은 반지층이었다. 정말 알쏭달쏭한 건축의 세계.
그런데 이런 우리 집 주소는 나만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배송지에 1층이라고 적어 택배를 시키니 반지층 집 앞에 나의 택배 상자가 놓여있었다. 이런 일이 빈번하여 이번엔 2층으로 물건을 시켰더니 이번엔 우리 집 윗집으로(이 집이 진짜 2층이긴 함) 배송이 됐다. 택배 상자랑 숨바꼭질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 참 난감했다. 간혹 위아랫집 사는 분들과 마주칠 때면 민망한 웃음을 짓고 후다닥 집으로 들어갔다.
택배보다 더 불편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배달 음식이었다. 배달을 주문하고 어플에서 배달이 시작됐다고 하면, 그때부터 귀를 쫑긋하고 있다가 우리 집 앞으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나가서 "여기에요~" 하고 배달음식을 받았다. (주말에 잠옷 차림이었다가 배달 시작될 때 옷 갈아입고, 음식을 받은 뒤 다시 잠옷으로 돌아오는 요상한 나의 속사정)
계속 이렇게 지내기엔 너무 불편한데 그렇다고 인터넷 쇼핑과 배달음식을 줄여나갈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고민하다가 우리 집 주소를 1.5층이라고 적었다. 이건 마치 해리포터 킹스크로스역의 9와 4분 의 3 같은 미지의 주소, 택배기사님, 배달라이더님~ 고민하지 마세요. 저희 집은 1층 같기도, 2층 같기도 한 1.5층입니다. 정수 사이 소수점의 혁신으로!!! 그 이후엔 집 문 앞에서 제대로 택배와 배달 음식을 받았다!!! 유레카! 소수점의 개념을 만드신 수학자*님 만세! 수학자님 아니면 영원히 술래가 되어 택배상자를 찾으러 다닐 뻔했어요.
*소수점이라는 개념은 이탈리아 수학자이자 상인인 지오반니 비안키니의 저서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그라찌에! (그라찌에 = 이탈리아 말로 감사합니다)
오래된 주택에 살며 그동안 몰랐던 비밀을 하나씩 알아가는 일이 재밌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치명적인 단점은 없다. 오히려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 사니 집 문을 열면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서 생활 동선이 아주 편하다(편의점 1분 컷! 대단지 아파트에선 상상도 못 할 짧은 거리)
단점보다 장점이 많음~~~!
앞으로 사계절을 지내면서 이 집의 기쁨과 슬픔을 몸소 경험해보려고 한다. 또 그런 일상을 브런치에 꾸준히 기록할 계획이다. 집에 살기만 해도 이렇게 글감이 생기다니!
나이만큼 속내가 아주 깊은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