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내에서 지난 8-9개월 간의 활동 결과를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발표자로 선정되어 열심히 했고 다행히 수상의 영광도 안았다. 개인의 성과가 아니라 팀 성과라서 더 잘 해야한다는 부담이 좀 컸는데 결과가 좋아서 기뻤다.
그 동안 여러가지 발표 자리와 경험이 있었는데 한 번은 발표 준비에 대해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일종의 가상 인터뷰를 준비했다. 도움이 되면 좋겠다.
수상을 축하한다.
고맙다. 오래간만에 여러 사람 앞에서, 그리고 큰 강당에서 발표라 약간 긴장 되었다. 무사히 잘 마치기만 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상을 예상했는지?
자료를 제출하고 발표장에서 잘 시연되는지 확인하는데, 운영진에서 '수상각'이라고 하더라. 사실 나도 다른 발표 내용을 현장에서 확인하였기 때문에 수상여부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앞선 발표자들의 내용을 듣다보니.. 잘하면 받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내가 발표에서 의도했던 내용으로 수상하지 않은 점이 의아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 발표의 핵심은 사전 활동을 통해 얻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새롭고 참신한 솔루션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참신함을 인정 받아 솔루션상을 기대했는데 정작 인사이트상을 받았다. 그래서 수상자 발표했을 때 이름을 듣고도 어?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였다.
어쨋든 받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사실 이번 발표에서 배운 점이 있다. 내 의도를 선명하게 전달하려고 했는데 그게 제대로 전달이 안된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자료와 발표 내용에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다른 점들이 부각된 셈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 말로는 내 발표에서 인사이트도 좋았어요,라고 하더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점을 다른 곳에 찍었었나 보다 싶었다. 당시 심사기준과 점수를 알지 못해 못내 아쉽다. 내 발표 기술이나 전달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발표가 있다면?
해외연수와 시상금을 두고 연말에 큰 발표회가 늘 있다. 입사하고 7년 만에 그런 큰 자리에서 발표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운이 좋았다. 해마다 발표 아이템이나 상대 발표자의 운도 따라야 한다.
원래 발표할 때 리허설을 잘 안하는 편이다. 개인적인 발표 준비는 물론 있지만,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같은 말반복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준비했던 애드립을 리허설 당시에 써먹으면 발표 하기도 전에 맥빠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 발표는 중요하기도 했고 팀 성과,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함께 들어간 것이라 여러 번의 리허설, 수차례의 자료 수정을 거쳤다. 아마 가장 열심히 준비했던 발표가 아니었나 한다.
한 편으로 아쉬운 사례도 있다. 3년 전 쯤 갑자기 과제를 맡으면서 연말 발표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 (고 하기엔 '너가 해'로 지정되었다가 맞는 표현이다). 게다가 회사 오너와 임원들이 주요 청중이었다. 문제는 원래 하던 분야의 일이 아니었는데 과제 리더로 발탁된 것이다. 당연히 내용에 대해 이해가 무척 부족했고, 나만의 시각도 없이 그저 내용만 외워서 발표했다. Q&A 시간에 받은 질문에 제대로 답도 못했다. 어찌보면 가장 쪽팔리는 발표였다고 본다. 시간을 돌린다면 다시 잘 준비해서 하고 싶은 마음이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쓰는 것은 무엇인가?
스토리 라인이다. 어떤 발표든 기승전결이 잘 맞아야 한다. 중간 성과 발표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심사위원에게, 평가자에게 어필할 수 있다. 좋은 내용이지만 전체 구성에 맞지 않는 요소는 과감히 빼기도 한다. 정말 넣고 싶다면 그 내용을 위해 스토리를 다시 구성하거나 필요한 부분만 재배치 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론 sense of humor라고 하는, 재미요소를 추구한다. 물론 발표 자리의 경중에 따라, 대상자의 이해도와 관여도에 따라 내용은 수정한다. 한 때는 좀 어린 친구들이나 대학에 회사 홍보강의 등을 가면 김성모 화백의 그림들을 쓴 적도 있다. 잠깐이라도 재미있는 장면과 멘트들이 있어야 주의가 환기된다. 내 자료에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집중 시키는 것은 어렵다. 최근에 본 어떤 글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대상일 경우 어떤 특정한 타겟군을 정해서 발표자료를 구성하는 것도 좋다고 하더라. 한두사람에게라도 공감을 일으키면 된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조언이라고 본다. 모두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연말 성과발표이고 주요 청중이 직속상사라고 생각해 보자. 그 상사가 좋아하는 내용, 이해를 잘 하는 부분, 적합한 표현 등이 반드시 있다. 그런 걸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전략적인 내용 구성과 선정을 할 필요가 있다. 연구직이니까 연구 결과만 충실하게 넣으면 된다? 아니다. 내 결과가 남들보다 더 돋보이고 인상적일 수 있도록 세일즈 할 생각은 왜 안하나. 연구자의 양심 문제가 아니라 회사원으로서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절한 애드립이다. 사실 이 부분을 꽤 중요하게 여긴다. 무심히 던지는 것 같은, 준비되지 않은 말처럼 보이지만 적절하게 먹힐 수 있는 표현을 한두 개는 꼭 마련한다. 발표 현장에서 급조하는 경우도 있다. 앞선 사람의 내용을 반영해서 내 발표에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굉장히 현장감이 살아난다. 미리 준비했다가도 기조와 맞지 않거나 청중 분위기가 별로면 하지 않는 말도 있었다. 반응을 살펴가며 던져야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므로 무조건 준비한 말은 다 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의 발표에 영향을 주거나 영감을 받은 사례가 있는지?
식상하겠지만 스티브잡스다. 생전에 그의 키노트 (애플 신제품, 기술 발표)를 좋아해서 수십번씩 보았다. 간결한 발표 내용과 유려하지만 쉬운 표현으로 핵심을 전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되는 (...) 기분이랄까.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맥북에어를 소개할 때였다. 얼마나 얇은 노트북인지 열심히 설명하고 뒤에 미리 준비된 서류봉투에서 꺼낼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 부분에 완전 반해서.. 당연히 맥북에어를 질렀다. 당시 얇기만 하지 성능은 별로 였는데 말이다. 게다가 가격은 엄청 났다. 흔히 '현실 왜곡장'으로 표현되는 그의 발표 내용은 그만한 매력이 있다. 앞에서 말한 스토리라인이 아주 명쾌하달까.
요즘은 가끔 TED를 본다. 짥게는 5분, 길게는 20분 정도 되는 시간에 자기 얘기를 전달하는 발표를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사내에서 발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청중의 성격 파악. 이 얘기는 여러 번 듣기도 했지만 가장 크게 동감하는 부분 중 하나다.
그리고 언젠가 선배와 얘기하다가 적어놓은 것이 있어 소개하고 싶다.
자잘한 내용보다 나만의 인사이트를 주어야 한다. 물론 주요 청중이 기술에 대한 이해가 높은 연구원들이라면 상세하게 소개할 수 있다. 그래야만 하는 자리도 있다. 반대로 임원이나 마케터와 같은 기술 비전문자일 경우엔 눈높이를 낮춰서 쉽게 설명해 줘야 한다. 그러므로 세부적인 기술 자체보다는 이 기술이 개발되면 어떤 임팩트와 제품으로 연결되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맞다. 이는 결국 비즈니스 관점에서 어떤 파괴력이 있는가를 전달해 주는 '큰 그림'이다. 이런 성격의 발표 기회를 잘 살리면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연구자들은 조금 과장하거나 비유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있는 그대로를 담백하게 전달하는게 미덕이라고 여긴다. 윗분들에게는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비유나 상징적인 표현들을 쓰면 더 좋다. 발표 내용엔 그런 것이 없더라도 적당한 멘트를 구사해 주면 도움이 된다.
나름의 꿀팁을 전수해 줘서 고맙다. 기타 조언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발표장의 특징을 미리 파악해 두면 좋겠다. 리모트를 이용해서 앞뒤를 넘기고 포인터를 쓴다면 어떤 버튼이 어떤 기능인지 사전에 파악해 둬라 (앞선 발표자에게 미리 물어보는 것도 좋다). 간혹 버튼을 잘못 눌러 시작하겠습니다, 했는데 프레젠테이션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다. 작은 실수지만 전체 발표의 완성도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발표자가 환경을 얼마나 잘 숙지하고 들어가느냐는 중요하다.
이번에 수상한 발표에도 주변인의 도움이 컸다. 내 발표 전에 카톡이 오더라. 뒷자리에서 마이크 소리가 잘 안들리니 입에 잘 붙이고 말해달라는 조언이었다. 이런 것은 참 고마운 경우다. 조언을 잘 챙겨들었고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발표였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팀을 이루어서 하는 발표와 준비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현장 상황을 물어보는 것도 발표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쇼맨십. 무대를 즐기면 좋겠다. 어차피 발표할 것이라면 듣는 사람도 즐겁게, 하는 사람도 즐겁게.. 이게 내가 추구하는 발표의 컨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