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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흐릿해지는 정체성에 대하여

주도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내 커리어를 반성하다.

by nay

'에이, 박사님이 왜 이러세요'

주로 문과를 나오거나 경영, 마케팅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분들과 얘기하다가 듣게 되는 말. 입사 연수 받을 때 선배 직원과 매장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그 분이 '제 차에 박사님은 처음 태워 봅니다'라고 했던 얘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 머릿 속에 있는 박사의 개념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자기 스스로 연구를 계획하고 추진해서 결과까지 얻을 수 있는 일련의 연구 과정을 마칠 수 있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박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개인의 브랜딩이니, 조직 안에서 내 위치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는 등의 얘기를 했지만 연차가 쌓여 갈 수록 조바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연구직으로 입사하고 다른 분야 (예. 마케팅 또는 영업 등 완전히 다른 직무)로 옮기지 않는다는 조건을 생각해 보자. 선택지는 딱 두 개다. 관리자 또는 기술 전문가.

지금의 괴로움은 어떤 길을 택하는 것이 좋을지 확실하게 선택하지 못한 내 탓이다. 회사 일이란 가만히 들여다 보면 '기획'에서 '실행'으로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기획은 주로 고연차의 몫이고 실행은 주로 저연차의 역할이 된다. 중간 연차는 기획도 하고 실행도 하느라 사실 제일 바쁘다. 나도 그런 중간 연차의 터널을 지나왔다. 그 때 경험해 보니 나란 사람은 기획력에 소질이 있어 보였다. 매니징도 나름 잘 한다고 생각했다. 중간 연차니까 직접 발로 뛰는 것도 많았다. 어쩌면 둘 다 잘 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때는 몰랐다. 박사 학위가 있는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회사 안에는 많은 경쟁자들이 있다. 물론 '너가 나의 경쟁자'라고 지정하고 (드라마에서처럼) 그를 저지하기 위해 나쁜 짓이나 암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경력이 낮은 시절에는 그런 것들이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앞서 말한 중간 연차 쯤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10년 쯤 넘어가니 그제서야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어떤 선배가 회사에서 연구원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면, 너는 몇 번째쯤 일 것 같니라는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경쟁자로 선택하거나 말거나 자연스럽게 경쟁의 구도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나와 비슷한 연차에 있는 직원들은 다들 착실하게 자기 위치에서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이다. 누군가 눈에 띌 만큼 훨씬 낫지 않은 이상, 비슷한 선에서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경쟁은 결국 자리 (매니저) 싸움. 어차피 조직에서 허락하는 자리는 한정적이다. 임원에 대해서는 말 해 무엇하랴.


팀장 후보군에 남들보다 일찍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가는 나를 보며 자신감을 잃는다. 처음부터 기술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연구직에서 크게 발을 떼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관리자가 아니라도 할 일은 많은데 말이다. 적어도 연구개발자로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 분야에서 인정 받는 위치에 이르렀다면 지금의 불안함은 조금 덜 할 텐데.. 하는 그런 후회가 문득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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