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건강한 연구문화 확산과 연구자 사기 진작을 위해 건강한 연구실을 선정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사 내용이 너무 간단해서 궁금한 마음에 조금 더 찾아보니 지난 2월에 공모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정 기준은 아래와 같더군요.
-연구성과 (우수성, 혁신성, 인력양성)
-연구실 관리 (연구과정, 성과 축적 관리, 안전관리)
-연구실 문화 (조직문화, 혁신 지향성)
어쩌다 이런 포상까지 가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과거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저는 그렇게 건강한 연구실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입니다. 같은 시대라고 해도 연구실마다 분위기가 많이 다르고, 지도 교수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이 대학원 실험실의 모습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제가 다니던 시절의 분위기는 건강함을 추구하던 방향은 크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학교 측에서 연구실을 건강하게 운영하도록 어떤 공식적인 움직임이나 정책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각 실험실 각자의 자정 능력을 기대하기엔 무리였던 시절입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참 오래되었지만 자꾸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바이오 커뮤니티 (주로 브릭)에 올라오는 대학원생들의 고민을 가끔 읽어 봅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지만 대학원에서의 문화적인 차이에 대한 갈등과 해결에 대한 필요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카이스트에 떠도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카이스트에 있는 사람들의 서열을 따지면,
교수 > 학생 > 오리 >>>>> 대학원생의 순서가 된다고요 (참고: 카이스트 중앙에 있는 연못에는 오리 가족들이 살고 있답니다).
또한 아래와 같은 유머 아닌 유머도 나옵니다. 대학원생의 위치를 비꼰 자조적인 내용입니다.
그냥 웃자고 한 얘기긴 합니다. 대학원생의 위치가 정말 이렇게 평가절하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담겨 있는 뜻은 그만큼 대학원생의 권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사실 상 없음을 뜻하는 것은 맞습니다.
학부 때 한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학생 시위가 한창이던 때에 시위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학교가 폐쇄된 적이 있었어요. 아무도 쉽게 들어가고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전경들이 수두룩하게 학교 출입문을 막고 서 있었지만, 자신의 실험 때문에 사정사정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겨우 실험실에 다녀왔다는 선배형의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대학원생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 치열한데 실험실 자체의 문화마저도 그들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겪었던 대학원생 시절을 돌아보며 누군가를 험담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엔 그때의 룰이 만연했기에 잘못됨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길에서 터득한 삶의 방법을 잘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문화가 고착화되면 잘못을 범하는 사람이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 모두 논리적이고 윤리적인 판단보다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지요.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이 조금 더 있긴 해도 결국 나를 포함한 모두의 잘못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선배인 내가 그렇게 겪어왔으니까, 후배들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거나 너는 그것도 이해를 못하느냐 (또는 참지 못하느냐)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요.
최근 카이스트에서 대학원생 처우 개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한 '교수와 학생의 신의 존중 헌장'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된 내용은 최소 연구 장려금 지급, 연구과제 참여와 휴가에 대한 보장, 졸업 기준의 명문화 등입니다.
2020년에 되어서야 이런 일이 현실화되다니 대학원을 떠난 지 오래된 저로서도 감개무량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내용이 헌장이라는 이름으로 발표가 되어야 할 상황이라니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정말 현실적으로 지속되어 대학원생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문화가 자리잡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