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이노베이션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제일 심각하게 겪는 문제 2가지가 있다.
첫째, 문제 정의 Problem statement
본사의 기술 니즈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솔루션 (또는 솔루션을 줄 수 있는 기술)을 발굴하고 제시하는 것이 이 일의 핵심이다. 선진 기술자들과 신규 네트워킹 확보.. 이런 식으로 목표를 잡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네트워킹은 솔직히 만들어도 무용지물이다 (개인 커리어 관점에선 도움이 될 수도?).
한국에 있는 직원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OOO 기술 잘하는데 없나요?', 'OOO 연구를 하고 싶은데.. '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 모호한 범위의 문제의식만 던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주제를 받아 들고 현지에서 관련된 연구자들을 만나면 그들은 항상 너희가 풀고 싶은 '구체적' 문제점이 뭐냐?라고 묻는다. 구체적인 문제는 말 그대로 상당히 구체적이어야 한다. 미팅 상대방에게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이렇게 해서는 얘(=말하고 있는 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싶은 표정으로 쳐다보기 일쑤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본사 과제를 할 때 늘 그렇게 접근했던 것 같다.
키워드 중심으로 상부로부터 문제를 받는다. 키워드를 기술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연구원의 몫이다. 그게 원래 할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진짜 기술을 입히려니 역량 부족인 경우도 많고, 그러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적절한 수준의 답을 찾으려고만 한다. 아니면 원래 하던 일에 경영진의 키워드만 하나 더 붙여서 슬쩍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풀지 못할 숙제를 그럴듯하게 변형시켜서 해결하는 양 보여주는 것이다.
큰 문제에 대한 기술적 드릴다운 능력이 부족하니 구체적으로 풀어야 할 작은 과제로 쪼개는 능력, 구조화하는 기술 skill이 떨어진다. 경영진이야 기술 이해도가 낮다고 해도, 그걸 임원이나 리더급에서 소화시켜 작은 문제로 쪼개야 하는데 앵무새처럼 디지털이 대세야, 맞춤형 연구를 해봐 라고 똑같이 키워드만 던져주는 셈이다. 담당자 입장에선 자기 눈높이에서 해결하려고 하니 자신도 잘 모르겠고, 윗선 눈치만 보이고, 오픈 이노베이션 담당자에게도 같은 요청만 한다. 어떻게 보면 현상황을 제대로 분석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만날 우리가 최고예요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무엇이 부족한지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한다. 최근에도 다른 회사의 진보적인 기술 전환에 대해 알아봐 달라길래, 과연 우리는 구체적 문제가 뭘까 물었지만 답이 없다. 현 수준에 대해 솔직하게 돌아보는 기회 정도는 가져야 채워야 하는 공극을 찾아내지 싶은데 반성이 부족하다.
뜬구름마저도 잘 해석해서 찾아내는 것이 오픈 이노베이션 매니저의 몫이라면 할 말이 없다만...
둘째, 내 일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하는 것
협업에서 보통 silo가 문제라고 한다. 다들 자신의 성과를 보호하고자 하는 욕심이 과한 경우가 많아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그것 말고도 기술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과 비슷한 외부 기술을 가져가면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툭하면 '그거 여기서(본사)도 할 수 있는 건데.. '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그러면서 외부 기술을 공유해 주면 자꾸 평가를 한다. A가 부족하네, B는 설익었네, 특허가 어쩌고.. 이런다. 평가 말고 가치를 봐 달라고요 제발. 부족한 건 우리가 고쳐다가 쓰면 될 일이다.
오픈 이노베이션 매니저 입장에서 나쁜 의도가 있으려나. 내가 그들을 해코지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내 존재가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 (선별해서) 괜찮아 보이는 기술을 전달해 주려고 한다. 그저 도움이 될 기술이나 연구자를 소개해서 부디 지금 하시는 일이 더 빛날 수 있게, 더 빨리 기술개발이 완료될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키워드라도 겹칠라치면 마치 자기들이 했던 일이 다 무산되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방어적인 태세를 하니 호의적이고 협력적이 되기 어렵다. 로레알이 ModiFace를 인수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로레알 같이 디지털 전환을 일찍 시작한 대기업이 내부적으로 저런 기술 과제를 한 번도 안 했을까? 내부에서 개발할 역량이 떨어졌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인수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공동개발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런 일들이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는 경우가 없다. 속도전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거 지금 개발 중'이란 메아리만 돌아온다. 여기 이미 당신이 하고 싶은 걸 완성해 둔 기술이 바깥에 있다고요. 꼭 내 손으로 만든 기술이어야 하나. 내부 역량에 대한 공격과 도전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제발 전향적인 관점에서 외부 기술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이미지: https://rickthoma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