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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 5개월 차, 우린 준비가 필요했다.

by nay

싱가포르는 Circuit breaker라는, 사실 상 Lock down에 준하는 강력한 조치를 하면서 강제적인 재택근무를 시행하였다. 나의 경우, 아들 학교에 확진자가 나오면서 남들보다 2주 일찍 재택근무를 시작하여 8월 말이 되면 만 5개월 동안 집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면서 제대로 된 준비 없이 5개월 동안 재택 근무를 해보니 느껴지는 점이 많다. 재택근무를 잘 하는 법, 나의 존재감을 유지하는 법 등 재택근무와 관련해서 다양한 관점의 글이 브런치에 있다. 나의 경우 거의 1년의 반 가까이를 집에서 근무해 보니 개인과 조직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남겨 본다.


개인은 이렇게 준비합시다

이전부터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회사원들에게는 꿈의 직업(직장)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잘 나가는 디지털 노마드 생활의 직업인들도 처음부터 성공적인 삶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옆에서 보기에 마냥 좋아 보인다고 준비 없이 유목 생활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인드셋을 다시 하자

재택이 주는 장단점을 미리 고민하자. 물리적 출퇴근이 사라져서 편하고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금물이다. 실제 초반 며칠은 더 열심히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부분도 있다. 난 집에서 일해도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이 길어질수록 긴장감은 떨어진다. 좋은 점만을 예상하지 말고 일이 잘 안되는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돌파할지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업무 시나리오, 업무 플랜 A/B 같은 것을 한 번 마련해 보자.


-주변을 정리하자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도록 한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화이트 노이즈를 만들어 두어도 좋다. 필요하다면 노래를 들으면서 집중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내 경우 업무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휴대폰이나 개인 컴퓨터 등은 물리적으로 멀리 두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안 그러면 자꾸 손이 가서 일을 하는 능률이 떨어졌다. 또한 아이의 방학과 재택근무 기간이 겹치면서 항상 집안이 시끄러웠다. 덕분에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의 도움이 컸다.

집에 있다 보면 집안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빨래가 다 되면 널기도 해야하고, 밥이 없으면 중간에 급하게 쌀을 앉히기도 했다. 살림살이는 필수적인 일이니 유연하게 업무 시간 내에 잘 해결하자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지만 집중도에는 영향이 있으니까).


-쉴 땐 확실히 쉬자

공간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사무 공간이 주는 긴장감을 집에서 그대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일의 중간에 잠시 쉼이 필요한데 집에서는 왠지 죄책감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8시간 내내 일에 집중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러니 집이라고 눈치 보지 말고, 쉴 땐 아예 늘어져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나았다. 십분 씩 소파에 늘어져서 있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쉼은 어디에도 도움이 안된다.

L1000751.jpeg 회사에선 힘든 짧은 낮잠이 오히려 능률을 높여 줄 때도..


-갇혀 있지 말자

외부 활동을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지만, 나 같은 집돌이들은 아예 며칠 동안 집 밖 구경을 안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실제로 한 일주일 정도 집 안에서만 왔다 갔다 했더니 아내가 크게 놀라며 제발 바깥 바람 좀 쐬라고 권했다. 딴에는 아무 문제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느 새 굉장히 까칠해진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외출을 좀 하는 편이지만 재택 근무가 길어지면서 가족들에게 짜증을 많이 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우울한 느낌이 지속되어 깜짝 놀랐다. 일 역시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당신이 만약 집돌이 성향이 강하다면 제발 일부러라도 밖에 나가서 몸과 마음을 리프레시 하자.


-새로운 것을 더 찾아라

예전처럼 맘대로 돌아다니기 어렵다 보면 일을 더 벌리기 보다는(도전), 있는 것을 유지하려는데 신경 쓰기 쉽다(관리). 같이 일 하는 파트너 업체 쪽에서도 진즉 끝났을 일이 늘어지기만 한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니 몇 개월의 기간 동안 업무 만족도가 확 떨어졌다. 나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강의를 매달 신청해서 듣고 있다. 반드시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도 개인의 역량 개발을 위한 온라인 강좌 등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앞서 말한 쉬는 시간에 유튜브 강의를 듣거나 책을 짬짬이 읽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재택 근무를 하면서 처음에는 이런 업무 방식도 괜찮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함께 일한다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집에서든 사무실에서든 각자 자신의 일을 충실히 완수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일터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 동료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기회가 찾아 왔다.


우리가 사무실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당연히 업무를 잘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것이 '업무 그 자체'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동료와 함께 일과 관련 없는 잡담을 하면서 업무에서 쌓인 감정을 해소한다. 온라인 메신저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감정의 선, 물리적 소통의 장점이 분명 있다. 또한 오며 가며 만난 사람과 얘기하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흔히 세렌디피티라고 부르는 기회 말이다. 필요에 의해서만 특정인에게 연락이 닿는 재택 근무는 줄 수 없는 만남이다.

사무 공간의 의미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부딪히면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회사는 이렇게 준비 합시다

일은 당연히 출근해서 자기 자리에 앉아 하는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되었다. 그러나 재택근무라는 것을 이제껏 누구도 해본 적이 없으니 조직 차원에서도 고민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정한다. 갑자기 싱가포르 정부에서 너네 다 집에서 일해, 라고 명령하니 당황스러울 수 밖에. 몇 개월이 흘러 돌아보니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되게 재택근무를 바라보는 입장, 운영의 방침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내 눈 앞에 사람이 당장 안 보인다고 불안해 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 상황을 효과적으로 운영할지 이제라도 잘 생각해 보자.


구성원이 기대하는 건 집에서도 일 잘 하라, 업무 차질이 없도록 주의하라와 같은 메시지가 아니다. 집에서 일하면 사원들이 뒹굴거리며 일은 뒷전일까? 어차피 노는 사람은 회사에 출근해도 알아서 잘(?) 논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회사가 구성원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한 바람은 태양과의 내기에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랜선 업무에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진정한 자율성에 기반한 성과 창출을 시도해 보자. 업무 공백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구성원에게 믿음을 주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 주어라.

DSC05157.jpeg 믿음을 가지세요.


아이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어갈 때 몇 개의 이메일을 연달아 받았다. 대부분 어떻게 수업을 운영하겠다는 내용이 많았지만 또한 아이들의 멘탈케어에 대한 것도 꽤 있었다. 예를 들면 온라인 명상 수업 같은 것 말이다. 당시엔 뭐 이런 게 필요한가 싶었는데 막상 내가 재택을 오래해 보니 학교의 준비성에 새삼 놀라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랜 기간 외부와의 물리적 관계가 줄어드니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나쁘게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시나브로 우울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회사는 업무 성과를 최우선으로 두겠지만, 그와 함께 직원을 진정성 있게 케어해주는 고민을 해야할 때다.

Circuit Breaker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마트로 달려가 Panic buying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불안감에 휩싸인다. 만약 직원에게 물적, 심리적 어려움이 생기면 어떤 식으로 서로를 도와주어야 하는지, 각자 어려움에 처하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회사 입장에서 제공할 솔루션을 고민하면 좋겠다. 성인의 멘탈이 아이보다는 강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방치해야 하는 것 또한 아니다. 학교에서 아이들 멘탈을 걱정해 주었듯, 회사도 직원의 멘탈을 잡아주자. 구성원이 아프면 그것은 결국 조직의 건전성에도 나쁜 영향을 주고 결과적으로 성과에도 마이너스가 된다.


추가로 하나 더. 거의 모든 미팅이 온라인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재택하면서 몇 번 온라인 미팅을 해보니 이것도 공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효과적인 온라인 미팅 방법, 회사원의 온라인 미팅은 무엇을 유의해야 하는지, 에티켓이나 가이드가 마련되면 좋겠다.



달라진 상황에서 과거의 기준과 운영 방침을 가져가는 건 맞지 않다. 뉴노멀 시대에 세련된 조직 운영이 아쉬운 건 욕심일까. 점차 나아지리라 믿는다. 특히 한국의 상황이 급속히 안좋아지면서 재택 근무를 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 분들과 회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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