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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Sep 24. 2020

업무량이 줄면 행복할까?

일이란 묘하다. 몰릴 때는 한없이 몰려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예전에 상무님을 모시던 때, 상/하반기 성과 정리를 하는 시즌이 도래하면 진짜 바빴다. 자료 작성을 시작으로 처리할 일, 부서에 요청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다들 자료는 왜 자기들 마음대로 써서 보내오는지..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붙잡고 있는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자리를 뜨기 어려운 날도 있었다. 겨우 시간을 내서 화장실 변기에 앉은 기회에 감사하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임원을 보좌하는 일이 아닌 연구개발 업무를 할 때도 상황은 비슷하다. 회의는 왜 그리 많은지 참 궁금하다. 회의가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후속 업무는 끝나질 않는다. 회의록, 해야 할 일을 담은 수많은 메일 속에 수신인이 되기도 하고 참조인이 되기도 한다. 


"일단 받게 되는 이메일이 확 줄어들 거야"

해외 근무가 확정되었을 때 한 선배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받게 될 이메일이 줄어들 것임을 얘기했다. 그는 미국에서 근무 경험이 있었다. 묘한 웃음과 함께 들려준 조언의 의미를 알듯 모를 듯했다.

싱가포르에서의 본격적인 생활과 업무가 시작되니 과연 그 선배의 예언(?)처럼 매일 도착하는 이메일의 양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한국에 없는 까닭에 과거에 참여했던 일들 중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이상 나를 찾을 이유가 없다. 처리해야 할 업무량은 상대적으로(사실 절대적으로도) 정말 확 줄었다. 

당연히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종류의 업무는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화장실 가기 힘들 정도로 바쁜 적은 없었다. 일의 성격 상 내부 부서와 연계된 일이 거의 없었던 까닭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회의도 없어지다시피 했다. 당황스러웠다. 상사와 정기 미팅이 있는 날이 그리워지다니 아이러니했다. 


보통 회사 일을 다룬 여러 책이나 만화를 보면 일에 치여 살고, 야근하고, 축 늘어진 채 하루를 겨우겨우 마무리하는 사람들의 고충이 가득하다 (나도 그런 시기를 지나왔고).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라면 지금 하는 일의 절반만 줄어도 참 좋겠다 싶을 것이다. 



정작 업무량이 줄어든 나는 행복했을까?

겪어보니,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어쩌다 일이 없는 하루의 가치는 바쁜 일상 중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매일 내 앞으로 도착하는 이메일의 양이라는 말에는 묘한 뜻이 담겨 있다. 솔직히 받기 싫고 열어 보기 두려운 이메일이 더 많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발 담은 일, 관계된 부서나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메일 양의 감소는 (수신이든 참조든) 한국에서 일할 때와 다른 환경에 노출된다는 것, 그리고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일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들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관련해서 회의에 참석할 일도 없다. 이메일을 읽는 시간, 답변하는 고민과 수고로움도 없다. 

정기적 또는 갑작스러운 회의 발생에 끌려다니듯 참석하는 상황이 사라지고, 이메일을 받는 횟수와 양이 줄어들면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드리운다. 


우선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싶다. 월급루팡이 별건가? 마냥 시간만 보내다가 집에 가면 그게 월급루팡이지. 누가 지켜보고 감시하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내 경력에 맞는 일 하나 찾아서 못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든다. 

다음으로 뒷방에 앉을 책상 하나만 내어 준 퇴물이 되는 기분이랄까. 사실 회사라는 조직은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것이 맞으니까, 몇 년 동안 어떤 일의 전문성을 가지고 자리를 잡았다 해도 빈자리는 곧 능력 있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결국 존재감의 문제다.


찾아서 하는 것이 회사원의 일

일이 줄어들어 즐겁기보다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상황을 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정면 돌파. 어떻게든 업무를 찾아 실행하는 것이다.


첫째, 있던 일도 더 적극적으로 소통한다.

업무 첫해 주요 미션의 하나가 해외 기술을 본사에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좀 더 판을 키워 보았다. 그동안 알음알음으로 진행했던 방식을 탈피해서 아예 정식 발표회를 기획해 보았다. 날짜를 확정하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직접 연구원 앞에서 발표를 하려니 기술 후보 그룹과 공식 미팅을 수차례 가지면서 기술의 실체를 파악하고 스스로 공부했다. 비록 본사에서 이메일은 적게 받을지언정, 현지에서 연구진과 연락을 하면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더 단단히 구축할 수 있었다. 그때 만든 네트워크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둘째, 없는 일이라면 만들어 보자.

회사원에게 필요한 것은 기획력. 리더급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역량 중의 하나다. 새로운 것을 찾아 가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늘 즐겁다. 본사에는 세팅되어 있지 않은 신기술을 가진 연구진과 자체적으로 공동 연구 계약을 맺고 진행했다. 과거엔 늘 본사가 계약을 했었다. 이번에는 본사의 조언을 듣고 도움을 받았지만 해외 연구소가 주체가 되어 일을 수행해 보았다. 비록 예상한 만큼의 성과는 아니었지만 과제의 끝엔 배움이 있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처음 해볼 때는 편하진 않지만 과정과 결과는 뿌듯하였다. 매일 해야하는 일도 당연히 있었고 말이다.


누구에게나 적당한 일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에 당연히 동의한다. 

너무 많은 일에 매몰되어 자신을 위한 시간까지 잃으면서 자괴감을 느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듯, 

오늘 하루는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해야 할 정도의 적은 일의 양도 좋지 않더라는, 그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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