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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Oct 02. 2020

거절의 달인이 되어 가는 중

얼마 전 한국에 있는 모 대학 교수님에게서 밤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본인 그룹의 연구 성과가 우리 회사랑 맞을 것 같으니 공동연구를 해 볼 기회가 있겠냐는 것이다. 우선 이런 연락은 감사하다. 그분 입장에서도 많은 고민 끝에 말씀 주셨으려니 싶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분이라, 몸은 싱가포르에 있지만 한국이든 어디든 괜찮아 보이는 연구 테마라면 누군가 관련 있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이 인지상정!


다음 날 연구테마에 관심 있을 몇 사람에게 문의했다. 최근 공동연구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진 회사 분위기도 알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비슷한 연구를 이미 다른 곳과 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래서 그 교수님께는 함께 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거절의 메일을 써야 했다.


외부 연구자들과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연구개발 내용에 대한 많은 제안을 받는다. 내가 하는 역할 자체가 그러라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자세히 들어가 보면 말이 좋아 오픈 이노베이션 매니저이지, 사실은 브로커(중개인)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

맞선을 주선할 때는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것만으로 곤란하다. 결혼이라는 Goal을 성사시키려면 소개할 당사자를 잘 파악해야 한다. 내 역할도 이와 비슷해서 상대방이 가진 기술에 대한 이해와 함께 회사 내부의 기술 니즈를 둘 다 파악해야 한다.

다만 중개하는 일을 할 때, 내 관심을 얼마나 쏟아야 할지 가끔 딜레마에 빠진다.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외부 기술의 장점만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쓴다. 성과를 올릴 욕심에 과몰입해서 내 기술인양 감정이입을 한 적이 있다. 그랬다가 본사에서 안된다는 답을 들었을 때 더 크게 상처 받은 경험이 있어서다. 가급적 제3자의 시선에서 Pros and Cons만 보려고 한다. 원래 이런 스크리닝(많은 후보에서 최종 유효한 후보를 찾는 것) 업무는 깔때기와 같아서, 걸러지고 좁은 구멍을 통과하는 성공적인 것은 몇 개 안된다. 


나머지 것들은 (대부분 내 손에서) 거절을 해야한다. 거절의 이유는 많다. 앞선 예처럼 이미 비슷한 연구과제를 다른 곳과 하고 있거나, 내부에서 개발을 하는 입장이라 외부 자원이 불필요하거나, 지금 당장 할 이유가 없거나 등등.

대놓고 거절이 어려운 것을 만날 때도 있다. 이런저런 개인적인 관계들이 엮인 연구자라던가, 기존에 이미 우리와 친분이 있었던 관계라던가. 처음엔 괜찮을 줄 알고 시작했는데 중간쯤 가보니 이게 아니다 싶을 때 다시 처음으로 판을 돌리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서 일할 때 과제리더를 맡으면서 공동연구를 추진하다가 엎어진 케이스가 있다. 그때 같이 같이 얘기 나누던 교수님과 관계가 흐트러져 한동안 서먹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마음이 불편하다. 



거절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명분은 팩트 그 자체여야 가장 아름답고 서로에게 깔끔하다. 명분이 명분을 찾게 되면 마음에 생채기가 난다. 그럼에도 때에 따라 그럴듯한 이유를 찾는 것은 해야 하며, 내가 할 일 중의 하나다. 


내 손에는 물 묻히기 싫다고 Good guy 역할을 하고 싶어서 본사의 담당자에게 안된다고 메일 써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지만 그럴 수는 없다. 결국 중개인이 직접 마무리도 해야 한다. Bad guy가 되려니 마음이 좀 쓰리긴 하다. 중개를 하고 난 후 (내 손을 떠난 일의) 상황을 들여다 볼 때가 있다. 간혹 회사 담당자가 상대방에게 관심 없음이나 지금은 함께 하기 어려움이라는 결정 사항을 전달하지 못하고 홀드 하는 경우를 본다. 그냥 NO라고 말하는 용기와 결단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 기회야 다음에 다시 찾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보면 혹시 거절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의아하다. 



이유야 어쨌든 거절의 당사자는 기분이 나쁠 터, 거절의 인사는 무조건 정중하게 한다. 또한 너무 길게 주저리주저리 말할 필요도 없다. 예전에는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몇 줄만 쓰려고 한다(단 성의 없어 보이게 너무 짧아도 곤란). 논문 투고했을 때 Reject 메일 받으면 제일 처음에 나오는 ‘We regret to inform you...’만 봐도 어차피 뒷줄은 읽으나 마나다. 게재가 안된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언젠가 거절은 default라고 마음먹고 매일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려고 노력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 거절 메일을 받는 분들도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제안해 주신 내용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일을 쓰는 내 입장에서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몇 번이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너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해. 이해해 줘'를 메일로 날리는 것이 이제는 익숙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우아하고 세련된 거절의 달인이 되고 싶다. 혹시 나처럼 중간에서 매개해 주면서 결자해지까지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술을 평가할 것이며 기계적 마인드로 사실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ps.

매년 개인 업무 목표를 잡을 때, 성과지표가 중요하다. 오픈 이노베이션 매니저 역할에는 몇 건의 중개 성과를 달성했는지가 잡혀있다. 그러다 보면 개인적인 성과 달성을 욕심에 두고 억지로 밀어 넣기 할 욕심이 생긴다. 이럴 때 제일 중요한 판단의 근거는 개인의 관점보다는 '조직’의 관점이어야 한다. 물론 밀어 넣기 한다고 모두 체결이 되고 공동연구가 발생하는 것은 절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가끔 개인 목표에 눈이 멀어 비밀유지 협약을 맺어서 성과가 있는 것처럼 만들거나, 어떤 기준에 못 미쳐도 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던가, 괜히 추진하는 모양새로 일을 꾸려 본다던가 등 '나는 할 만큼 했어' 식의 대응자세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 정말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일인지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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