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앱을 하나 쓰고 있다. 매일 실천하는 항목에는 운동과 비타민 먹기 등 내용이 다양한데, 그중 하나에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아요’를 넣어 두었다. 앱을 열어볼 때마다, 그리고 앱에서 주는 알람이 올 때마다 그 내용을 되새긴다.
아이는 신비한 존재다. 나와 아내의 유전적인 인자를 고르게 갖고 태어났다. 먹고 자고 싸는 동물적인 본능만을 가지고 있던 존재에서 논리적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사회에 던져지기엔 나약해서 보호가 필요하지만, 핏덩이라는 표현이 적당한 때를 떠올려 보면 만 열 살이 된 지금은 놀라울 정도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궁금하다.
그런데 커가는 아이의 모습과 함께 갈등의 양상도 다양해지고 골도 깊어진다. 세상에 내 마음처럼 따라주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아이에게는 유독 감정이입이 심하다. 가령 국어나 수학 문제를 풀 때 이해가 안 가서 모를 수도 있고, 기억을 못 할 수도 있는데 왜 그걸 모르냐고, 기억을 못 하냐고 채근한다. 어른도 완벽하지 않은데 아이에겐 완벽을 요구하며 내 기대만큼 되지 않는다고 혼을 내고야 만다.
여기저기 늘어놓은 책이나 장난감, 옷가지를 보면 ‘지가 치우지도 않으면서 어지럽히기만 하네’ 하며 또 화가 오른다. 보통은 참고 넘어가지만 어느 날 쓸데없는 이유로 폭발한다. 그러면 화를 내는데 나와 아이 모두에게 상처만 남는다. 행동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감정으로 대응하기 일쑤다. 물론 내 입장에서도 아이의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죄송해요, 치울게요, 제가 깜빡했네요 보다는 항상 핑계를 대는 태도가 감정의 불씨를 끌어올린다.
이런 수많은 감정 소모의 끝에, 결국 매일 지켜야 하는 다짐에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기'를 넣게 된 것이다.
'화를 내기’로 결심하는 것은 자신이다.
화를 내서 문제가 해결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화를 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화는 관계를 더 악화시키고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나의 슬기로운 감정 생활> (이동환)
최근에 한 번 부딪힘이 있었다. 결국 욱하는 마음이 올라와 아이가 읽어달라고 가져온 책을 멀리 던져 버렸다.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만, 아이 보는 앞에서 매몰차게 책을 던진 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참 못난 행동이다. 몹쓸 짓이고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매일 쳐다보는 습관 들이기 약속은 무엇 때문에 한 것인가.
아내에게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상대가 어른이고, 아내와의 갈등은 한 번 벌어지면 봉합하기까지 힘든 과정이 있음을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런 조심성이 아이에게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모인 나는 너의 보호자이면서 강자라는 인식이 이미 자리 잡은 터다. 당연히 그런 마음과 생각을 의도적으로 한 적은 없다. 그저 본능적으로, 경험적으로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이 아이가 나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화를 내고, 혼내고, 윽박지르고 못되게 해도 결국 최종 승자는 어른인 나다. 그걸 알기에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해 버린 것이다. 보통 아이의 잘못도 있지만 감정으로 대응하는 어른의 잘못이 더 크다. 화를 낸다고 갑자기 아이가 문제를 잘 풀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항상 반성은 아이가 하고, 어른인 나는 네가 아직 더 배워야 하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기만 한다. 이것은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훈육이란 핑계를 가져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책을 던진 후 곧바로 사과했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행동의 당위성을 스스로 용서하긴 어렵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훈육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부모의 감정 배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는 별개로 감정에 치우친 행동에 반성한다. 좋은 아비가 되기에는 수양이 많이 부족한가 보다.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 부끄러운 고백을 여기에 남겨 본다. 인격적 성숙함의 부족을 고해성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