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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Nov 28. 2020

떠나는 선배들을 생각하며.

퇴직이란 말은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나와 별로 관계없는 이야기, 떠나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과 같은 것. 회사에 들어와서 나보다 더 오래 잘 다닐 것 같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가고, 그들을 배웅하는 일은 많았다. 남겨진 사람은 떠나는 사람에게 잘 될 것이라고 응원하면서도 나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니지라고 여겼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희망 퇴직자를 받았다. 창립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폭발적인 성장의 시대가 끝나 매출과 이익이 예년보다 못할지라도 마디게 성장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불황의 끝을 보기가 어렵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더니 대체 그 골짜기는 어디쯤 내려가야 다시 반등할까 궁금하다. 구조조정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나오기 전에 어쩌면 회사가 제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려의 기회가 아닐까 싶다. 내가 입사했던 바로 다음 해까지 회사에 들어온 사람들이 대상이다. 15년 이상 회사를 다닌 사람들. 보통 20대 중후반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고 보면 3, 40대의 가장 열심히 일했을 시기를 이 회사와 함께 보낸 그들이다.


경력과 연차가 부담이 되는 시기가 올 줄이야. 

저 이 회사 오래 다녔습니다 하는 말이 이제는 퇴물입니다, 조직에서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는 말과 동급이 되어 간다. 조직은 생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오래된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문제는 사라지는 것에 '나'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아직 더 조직에 기여할 바가 있다고 스스로는 믿고 있고 또 그럴 자신이 있지만 회사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니 마음이 씁쓸하다.

누군가의 말 마따나 '희망'이란 단어가 슬프게 다가온다.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 인생의 끝도 아니고, 회사 생활의 실패도 아니다. 무릇 15년 이상 한 회사에서 있으면서 흥망성쇠를 보고 동고동락했다면 그 안에서 배우고 깨닫는 인생의 교훈, 조직 생활의 교훈이 얼마나 크겠는가. 누가 감히 떠나는 사람을 가엽게 또는 가볍게 여길까. 그저 안타까운 것은 밀려나듯 떠나야 하는 상황이 주는 슬픈 감정이다. 회사가 어려워짐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희망퇴직이라는 기회에 손을 든 사람의 자발적인 선택일지라도 어쨌든 장기 근속자로서 더 멀리 함께 갈 수 없음이 아쉬운 것이다. 어차피 이 곳에서 평생을 바칠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지만 이젠 자신이 성장의 주축이 아니라 조직의 부담이 된다는 생각에 슬퍼진다.


차라리 이런 것을 보면 좀 더 유연하게 이 곳 저곳으로 경험과 경력을 쌓는 것이 어쩌면 나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 이런 먹먹한 느낌은 덜지 않을까. 일 잘하고 자신의 열과 성을 다했던 선배들의 떠남을 이번에도 바라보며, 곧 나도 후배들에게 그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 주는 때가 멀지 않았음을 깨닫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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