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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Dec 02. 2020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모든 것이 효율적이어야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상한 관습인지 모르겠는데 보통 많은 보고서가 소위 개조식이라고 부르는 서술 형태를 갖는다.


개조식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개조식 서술이란 서술형 문장과 반대 개념으로, 간결하고 요점적인 서술을 의미합니다. 즉 내용을 길게 풀어서 표현하지 않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만 간추려서 (항목별로 나열하듯이)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네이버 지식인 답변).


개조라는 말 자체도 들으면 직관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데, 개조식으로 보고서를 쓰라고 하니 더 어렵다. 위처럼 풀어서 설명해 줘야 이해하기가 쉽다. 개조식으로 문장과 내용을 구성하다 보면, 이상한 형태의 글이 가끔 완성된다. 개조식의 형식에 맞추려다 보니 풀어서 설명하기보다는 핵심어 위주의 연결을 잘하는 것에 초점이 맞는다. 다른 회사 보고서나 기획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우리 회사의 전형적인 보고서 예시는 아래와 같다. 특히 과제 목표에서 말 줄이고 개조식으로 쓰는 것이 빈번한데, 그러다 보니 매번 이게 뭔가 싶은 것이 많다.


-OOO 최고 수준의 제품 개발을 위한 XXX 소재 확보

이 정도는 무난하다. 뭘 하겠다는 것인지 그래도 잘 이해가 된다. 좀 더 뜯어보면 최종 목표는 최고가 되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것, 그런데 그걸 하기 위해서는 어떤 소재가 있어야 한다, 이런 내용이다. 한 번에 두 가지의 목표가 담겼다. 과제 성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통 단기 목표는 XXX 소재 확보에 맞출 것 같다. 차라리 그냥 XXX 소재 확보를 목표로만 잡는 것이 더 명료하지 싶다.

그러면 그걸로 뭐 할 건데? 하고 질문이 들어올까 봐 OOO 제품 개발을 앞에 달았으리라. 명분이 있는 업무여야 하다 보니 말이 길어지고, 말이 길어지니 뜻 전달이 정확히 안 되는 경우가 생긴다. 다 장단점이 있다.


-OOOO 기술 구축을 통한 AAA 경쟁력 확보 및 XXXX을 통한 BBB 기반 구축

'및'은 '그리고', '또' 이런 의미다. 그래서 같은 종류의 성분을 연결할 때 쓰는 것이다. ~ 및 ~라고 연결을 하려면 두 내용이 크게 차이가 있지 않아야 한다. 두 내용이 연결성이 있다 해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 및 ~ 로 연결하기보다는 분리해서 쓰는 것이 더 좋다. 일단 내용이 길어지면 쓰는 사람 스스로 갈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간결하게 항목이 나눠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 목표 내용에도 2가지의 각기 다른 목표가 함께 있다. AAA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과 BBB 기반 구축은 엄밀히 레벨이 좀 다르다 (여기서는 실제 내용을 다룰 수가 없어서 아쉽다). 그러니 꼭 ~ 및 ~으로 연결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경쟁력 확보라는 목표 하나, 기반 구축이라는 목표 둘, 이렇게 각각 따로 얘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문제는 규모가 큰 한 과제 안에 세부로 나뉘는 목표들을 묶어서 전달하려다 보니 생긴다. 막상 읽으면 '응, 그렇지' 하고 이해는 되면서도 레벨이 다른 목표들이 나열되면 그런데 이게 맞나?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솔직히 개조식 보고서에 익숙하고 또 수없이 작성해 봤다. 그런데 갈수록 개조식 보고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느껴진다.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요약하는 느낌으로 정리하는 것인 반면, 내용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간단하게 해석이 안 되는 일종의 암호와도 같다. 여러 번 읽으면서 숙독해야 아.. 이런 얘기구나 하고 이해가 된다.


개조식으로 요약을 하다 보면 이렇게 쓰면 안 될 것 같은데 싶은 순간이 있다. 축약과 압축은 내용의 손실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숙고 끝에 서술형 문장을 멋지게 요약하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라면 기술이고, 보고서 작성의 역량이 높다고 칭찬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냥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한다. 그걸 줄이고 요약하는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의 가치보다는 차라리 그 시간에 과제의 본질을 고민하는 것이 좋다. 여담이지만 워딩 하나 하나에 너무 공들이는 것이 업무의 본질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회사의 소통 언어로서 적절한 말과 표현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것에 매몰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문화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개조식을 꼭 쓰고 싶다면 앞부분에 요약 및 소개 수준에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 보고서의 내용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서술형으로 쓰는 것이 좋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술형으로 쓸 때 중언부언하거나, 만연체로 쓰면 안 된다. 개조식의 장점은 간단명료하게 핵심 내용만 추린다는 것이므로 이런 형식의 보고서나 기획서를 선호하는 상사들도 많다. 상사의 취향을 잘 존중해 주면서 내 스타일이 담긴 보고서, 계획서, 기획서를 써 보자. 개조식으로 전개하려고 너무 요약하는 바람에 중요한 서술어가 생략되거나 위에 예시를 든 것처럼 '~를 통한 ~의 구축과 ~의 확보'처럼 복잡한 내용과 이해 어려운 구성만 조심하면 좋겠다.


문장으로 과제 제목이나 목표를 쓰는 것이 어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서술이 아닌 개조식으로 하다 보면 답답하고 아쉽다 보니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항상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맞게 구성을 하는 것이 우선임을 잊지 말자. 형식은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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