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y Apr 01. 2021

진정성 있는 연구개발-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최근 meal kit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식사를 준비한 적이 있다. 어찌나 잘 포장이 되어 오는지 깜짝 놀랐다. 야채와 고기를 볶기 위해 올리브유까지 포장되어 있었다. 집에 조리도구만 있다면 그 요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셈이다. Kit라는 이름을 괜히 붙인 게 아니었다.

그러나 요리가 끝난 후 뒤처리를 하면서 '현타'가 왔다. 다름 아닌 죄책감을 느꼈다. 개별 포장된 재료들의 포장 쓰레기가 생각보다 너무 많았던 것이다. 좀 더 작게 포장했어도 좋았겠다. 이제는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죄책감을 느낀다. 환경에 대한 이슈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후손에게 빌려 쓰는 지구’라는 말이 맞다.


오늘은 ‘라떼는 말이야’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해야겠다. 석사 시절로 올라간다.

실험 도구 중에 파이펫이라는 것이 있다. 속이 비어 있는 막대관인데 액체를 다룰 때 쓴다. 세포 실험에서 주의할 점은 바로 오염 contamination이다. 그걸 방지하려다 보니 보통 1회용, disposable plastic ware를 쓰는 것이 일상적이다. 세포 오염으로 중요한 실험을 날리는 것보다는 돈이 들고 쓰레기가 나와도 1회용을 쓰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임은 어쩔 수 없다.

빨간 액체가 들어 있는 것이 유리 파이펫 (출처: 인터넷)

그런데 내가 석사로 갔던 실험실은 유리 재질의 파이펫을 썼다(1998년). 연구비 많은 다른 교수님 방은 1회용 쓴다는데. 유리 파이펫은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쓴 뒤에 세척을 하고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autoclave라는 멸균 과정을 거쳐 몇 번이고 다시 쓸 수 있었다. 심지어 1회용으로 쓰라고 만든 플라스틱 재질의 튜브가 있는데 이것 마저도 닦아서 2-3번 썼다. 처음엔 중요한 샘플 다룰 때 깨끗한 상태로 쓰고, 나머지 대충(?) 써도 되는 실험에선 세척된 걸 가져다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석사 신입생은 아침에 오면 선배들이 열심히 실험한 뒤치다꺼리 - 설거지 - 하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다. 그땐 참 교수님 욕도 많이 했지만 돌아보니 뜻밖의 환경 사랑 실천이었달까.


ESG 활동에 대한 강조가 이젠 새롭지도 않다. 기업의 지속가능을 위해서는 Environmental, Social, corporate Governance를 위한 액션이 중요하다. 지구라는 공동체의 영속성을 위해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과 브랜드가 늘고 있다. 오늘 상무님이 마케팅 부서에서 조사 및 정리한 클린 뷰티 보고서를 추천하면서 연구 개발에도 클린, 즉 환경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겠다는 코멘트를 남기셨다. 그러면 우리도 환경을 생각하면서 1회용 사용을 줄여볼까? 하는 단순한 생각을 하다가 석사 시절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연구 방법과 문화에 대해 각자 생각이 다를 것이다. 나는 평소 in silico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In silico는 컴퓨터로 하는 모의, 가상의 실험을 보통 의미한다. 물리적 실험을 하면 지금처럼 필연적으로 waste가 발생한다. 그것도 대부분 플라스틱이라서 환경을 생각하면 바람직하지 않다. 컴퓨터 모델링으로 실험을 대신하게 되면 1회용 실험 도구의 소비를 줄이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엄청난 컴퓨팅 파워로 서버를 운영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 생산을 위한 것이 친환경적 방법이라면 더욱 좋겠다.


물리적 실험을 하더라도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실험 디자인, 반복 실험에서는 꼭 필요한 최종 결과 중심으로 확인하는 합리적 접근 등 플라스틱, 1회용 도구의 사용과 waste 발생을 줄일 수 있는 기회는 많다. 아니 줄여야 할 때가 되었다. 막연하게 될 때까지 하는 연구는 연구자를 지치게도 하지만 환경을 생각해도 좋지 않은 일이다.


스티브 잡스는 제품의 안쪽, 보이지 않는 곳도 엄청난 미학적 집착을 바탕으로 설계하도록 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스러워야 했던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집착마저도 진정성 있는 제품 개발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실험실에서 행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환경에 대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ESG 활동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는 이때, 단순히 소재와 제품의 스토리만 중요하지 않다. 연구개발에 소모되는 모든 프로세스 하나하나가 함께 준비될 때 비로소 "찐" 진정성을 갖춘 제품이 탄생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울 게 없다면 떠날 준비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