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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Apr 09. 2021

업무에서 기본과 약속을 지키는 것

1. 

공동연구 보고서를 쓰고 상대방에게 공유했는데 질문이 한아름 달려서 왔다. 답을 다는 도중에 상세한 실험 조건을 묻는 것이 있어 잘 알고 있을 법한 동료에게 물었다.

"그거 OOO님이 계산했는데, 아마 (기록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가 말한 OOO님은 팀까지 이동한 터라 한숨부터 나왔다. 혹시나 하며 물어보니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럼요, 그거 연구노트에 적어 뒀는데요"

다음 날 그녀는 메일로 친절하게 실험 조건에 대해 알려주었고, 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자신 있게 달 수 있었다.


2.

얼마 전에는 1년 전에 한글로 발행된 보고서를 영문으로 번역해서 진행할 일이 생겼다. 보통은 한글 보고서를 썼던 담당자가 처리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 사람 역시 팀을 이동해 버렸다. 원래 내가 처리할 일은 아니었는데 선뜻 대신해 보기로 하였다. 어느 정도의 업무 로드가 걸리는지, 시간은 얼마나 잡아먹는지, 작성할 때 고민의 포인트는 어디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이미 내용이 완성된 보고서를 영문으로 바꾸는 것이라 텍스트로 된 콘텐츠는 그대로 번역하면 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실험 결과를 그래프로 그린 부분이었다. 한글로 표시된 부분을 영문으로 바꾸자니 엑셀로 보관해 둔 원본이 필요했다. 내가 했던 실험이 아니기에 데이터를 정리한 포맷을 살짝 걱정했다. 보통 다른 사람의 원본 데이터를 열면 한눈에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괜한 걱정이었다. Raw data부터 계산식 반영해서 최종 결과물까지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 누가 작업을 해도 잘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각자의 방식으로 내용을 정리하거나 기록해 두기 쉽다. 사소하게는 폴더 이름을 만드는 방법, 폴더의 정렬법 조차 서로 다르다. 그런 부분까지 규격화해서 통일해 둘 이유는 없으나 적어도 데이터를 다루는 영역에서는 규칙을 정해서 같은 방법으로 다루도록 해야 한다.


제일 첫 사례에서 질문의 내용은 처리 물질을 용매에 녹인 농도였다. 생각해 보면 아주 간단한 내용이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농도 조건은 끄적끄적 아무 데나 계산하기도 하고, 통상적인 조건을 알고 있는 경우는 특별히 기록을 남기지 않기도 한다. 같은 실험을 반복하더라도 세부 조건을 바꾸는 때가 있거니와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디테일은 잊기 마련이다. 원래 연구노트는 반드시 꼼꼼하게 적어야 한다고 대학원에서 배우고 또 배웠지만, 귀찮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기록을 하지 않는 사례를 많이 목격해 왔다. 기본을 지키면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troubleshooting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처럼 몇 달의 시간이 지난 뒤 누가 물어봐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실험 결과물인 데이터의 처리 방법을 모두 통일할 필요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이 다른 점이 있다. 누군가 나서서 하나의 통일된 양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다룬다. 예를 들어 데이터를 나열하는 방법, 계산식을 만들어 최종 값을 얻을 때까지 전개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최종 산물(예를 들어 그래프)은 동일할진대 그 과정에서 사소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업무는 대부분 반복적이고 일정한 수준의 규격화가 된 실험 프로토콜을 따르는 특징을 갖고 있다. 표준작업 지침서라고 부르는, 이미 잘 정리된 실험법에서 소재의 성능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이다. 실험을 하는 프로토콜의 규격화와 함께 친절한 누군가가 잘 정리된 데이터 처리 양식까지 마련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다들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겠거니 믿었는데 최근 같이 일하고 있는 동료 중 한 사람은 자기만의 데이터 처리 양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그의 개성을 존중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결과물은 같지 않은가. 그랬는데 이번에 다른 사람의 실험 데이터를 타인인 내가 처리해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개성은 다른 부분에서 충분히 발휘하면 된다. 적어도 이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의 통일된 방식을 충실히 따라줘야 할 이유를 찾았다. 약속에 맞춰 둔 자료이기에 '독해'를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혹시 자리를 비우거나, 팀을 이동하거나 회사를 떠난 뒤에 과거의 데이터 일지라도 후배나 동료가 아무 문제없이 일처리를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기본과 약속을 지키면 문제가 생겨도 반 이상 해결하고 들어간다. 지키는 과정이 번거로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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