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y May 23. 2021

글로벌 경험에서 오는 짬의 위력

3년의 연구소 주재원 생활이 남긴 것

파견 1년, 주재원 2년의 해외근무는 회사 생활에 어떤 의미일까.

파견으로 시작했던 첫 1년의 시간은 솔직히 해외에 대한 경험을 중심으로 지내다 오자는 개인적 욕심이 있었다. 반면 주재원 2년은 회사에서 받는 혜택만큼 성과에 대한 부담이 컸다. 성과를 내는 것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에 글로 쓴 적이 있다. 독자적인 결정과 실행을 하지 못하는 환경적 요인이 컸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것이 어찌 환경 탓으로 끝날 수 있겠는가. 구하려고 하면 또 어떻게든 찾아진다. 안 되는 일도 만들어 내는 것이 비즈니스다.

이제와 갑자기 해외 근무가 무엇이었던가를 반추하는 이유는, 최근 오랜만에 영어 화상 미팅을 했기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 연구소에 복귀해서 5개월가량 지나 주위를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도 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했듯 성과의 부담은 나를 움직이게 만들어 만 3년 동안 이런저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여기(싱가포르)서 근무하고 있지 않다면 내가 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평생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가끔 들 정도였다. 갈수록 '나 혼자' 해낼 수 있는 연구의 프로젝트는 사라지고 있다. 컨소시엄을 구축하고 서로의 강점을 통해 빅 프로젝트를 만들어 내는 시대다.
네트워킹은 서로 원하는 부분, 즉 sweet spot이 어딘가 존재할 때 제대로 공고해진다. 때로는 알고 지내는 것 자체가 가치를 가질 때도 있지만 (해당 분야의 big guy와 밥도 먹어 봤다는 것 같은 가십거리), 회사와 학교, 회사와 연구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공동 관심사에 기반한 프로젝트 창출과 같은 성과물이다. Win-Win이란 것이 별 것 아니다. 학교는 산학 협동이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일차적인 성과를 얻고, 회사 역시 학교의 좋은 교수/학생을 활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향력과 boundary를 넓히는 작업을 한다. 물론 당장 써먹기 좋은,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있다면 가장 좋지만 일을 하는 것과 성과로 인정받는 것은 적당한 운의 작용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해외의 학교들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산학 협력의 괜찮은 그림, 졸업생의 업계 진출 같은 이슈에 늘 목말라 있음을 확인한 것도 해외 근무에서 얻은 작은 교훈이다.


가장 크게 체감하는 부분은 의외로 별 것 아닌, '영어로 이메일 주고받기'에 대한 부담을 잘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해외 근무를 해야 비즈니스 이메일을 영어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도 필요하면 영어로 했다. 영작이 안되면 번역 사이트의 힘을 빌면 된다. 다만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다양한 상황에 노출되었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 내용을 써야 하는지, 적당한 표현은 무엇인지, 2-3차례 오고 가면 호칭은 어떤 게 나은지, 피드백에 대한 글로벌 비즈니스 에티켓은 어떤 것인지와 같은 걸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이다. 잘 들여다보면 글로벌 비즈니스에 대한 맛만 본 셈이다. 마치 입사 3-4년 차 직원이 이제 좀 회사 일 알겠네~하는 허세 가득한 느낌? 허나 이 또한 싱가포르 근무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부족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오늘도 독일의 모 회사에 이메일을 하나 썼는데 그냥 간단한 것들은 그냥 막 저절로(?) 써진다. 기본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어서 스스로 이제야 비로소 기본기는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부수적으로는 해외 파트너와의 계약에 필요한 서류와 프로세스를 잘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걸 알아서 좋은 점은 trial and error를 줄여서 괜한 시간 낭비가 적다는 것에 있다. 서류 작업이란 것이 은근히 챙길 것이 많다 보니 한 번에 잘 안되면 그것도 스트레스가 된다. 무슨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지, 법무팀과 소통은 어떻게 진행해야 좋은지 등, 경험에서 쌓인 짬으로 효율적인 업무가 가능하다. 


다양한 연구자들과 만났던 회의실

또 하나, 결국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는 것을 새삼 각성했다. 한국인은 '정'의 문화가 크고 우리가 남이냐, 식의 관계 설정에 익숙하다. 언젠가 한국에서 진행한 회의에서 어떤 과제의 리스크 관리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답변으로 돌아온 것이 '그래서 상대방과 밥도 자주 먹고.. ' 이런 내용이었는데 진정 농담이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상대적으로 더 깐깐한 싱가포르 사람들의 문화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뭔가 이야기를 진행하려면 결국 디테일한 부분에서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해야 했다.
한 번은 연구 용역을 진행하는데 우리가 줄 수 있는 연구비의 제한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협의 과정을 통해 할 수 있는 실험의 디자인을 연구비 규모에 딱 맞게 설계해야 했다. 예를 들어 인건비는 full time 참여에서 part time으로, 연구 방법에서 실험군은 4개에서 3개로.. 이런 식이다. 각 항목에 대해 몇 천 SGD (싱가포르 달러)인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요즘 상사의 제안으로 한국의 어떤 학교와 공동연구를 설계하고 있는데 상사가 연구비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 너무 보수적이라 상대방과 협의하는데 답답함을 느낀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필요한 만큼 지불할 준비는 필요하다. 내가 무조건 후려쳤다고(?) 회사의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상대방도 납득할 만큼 돈을 주고,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된 성과를 얻는 것이 더 맞는 방향이 아닐까.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확장된다. 내가 일하는 방식만이 최선이라고 알고 지내지만 바깥에 나가보면 전혀 다르거나 나은 방식이 있다. 흔히 회사의 문화로 요약되는 일하는 방식이 모든 경우에 정답처럼 여겨지고 당연하다고 느낀다면,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나처럼 다른 문화를 체험한 사람들의 몫은 굳어있는 조직 문화에 경종을 울리고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차이가 일잘러를 만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