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때 단백질의 3차원 구조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유전자는 생명의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지는 못한다. 생명체의 기능은 유전자 정보에 기반하여 단백질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작동할 수 있다. DNA가 뇌에 해당한다면 단백질은 손발과 같은 기능이랄까 (여기서 말하는 단백질은 세포 수준에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DNA를 복제하는데 필요한 효소, 세포 안에 쌓이는 노폐물을 처리하는 청소 역할, 필수적인 기능을 위한 구성 성분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 단백질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3차원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구조가 조금이라도 헝클어지거나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하면 원래 해야 할 기능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뿐더러 중요한 단백질의 경우엔 질병과도 연관이 된다. <Structure determines function>이라는 기본 개념은 단순히 분자 수준의 단백질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몸속의 어떤 기관 organ이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에 맞는 모양을 적합하게 가져야 한다. 심장은 심장의 모양을 제대로 갖출 때 온몸에 피를 제대로 보내준다.
화장품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그냥 두면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을 계면활성제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안정화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계면의 구조가 변하면 안정도가 떨어지고, 결국 상 phase이 깨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을 잘 살펴보면 구조나 모양의 적절한 형태와 유지가 필요한 기능에 필수적임을 발견할 수 있다.
해외의 유명 회사를 다니다가 입사했던 외국인 동료가 얼마 전 퇴사했다.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그에 비해 공감을 많이 주고받은 사이다. 4년 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사실 그의 입사와 동시에 난 언제 떠나게 될지 궁금해 했었다. 퇴사를 바란 것이 아니라 적응이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 탓이다. 퇴사 전 잠깐의 티타임에서 떠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부적응? 소통이 잘 안 되는 언어? 선후배 관계?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회사의 구조 structure 였다.
그가 말한 structure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함께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으나 이야기하다 보니 어떤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흔히 hierarchy라고 부르는 위계질서, 변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문화를 의미했다(회사의 구조라고 하면 조직 구조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걸 뜻하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무형의 무엇, 예를 들면 부서와 부서 또는 사람 사이의 이해 관계, 그로 인한 결과물 같은 것이다. 회사라는 조직의 관점에서 구조가 결정하는 것, 즉 기능은 '기업 문화'라는 형태로 발현된다. 경직된 구조로 인한 특유의 문화 속에서 그가 겪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말이 갖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상대적으로 liberal 한 외국인의 시선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한국인이고 오랫동안 회사 안에서 버텨온 나는 적응의 단계를 넘어 이제는 순응의 상태다. 구조의 문제로 인한 기능의 불합리함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는 상태란 말이다.
조직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지만 실제로 잘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의 보수적 성향이 이유 중 하나겠지만,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한 기능에 맞는 적합한 구조를 갖추지 못한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보수적 성향을 만들고 강화하는 원인 자체가 구조이기도 하다. 사실 몇 천명이 일하는 조직의 운영을 간단히 생각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 그로 인한 회사의 문화가 최적의 기능을 위해 진화 발전해 온 바람직한 모습일지에 대해 꾸준히 질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구조가 기능을 결정한다'는 말에는 최선의 기능을 위해 구조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역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원래 그렇다, 라는 선입견으로부터 탈출해서 구조를 바꿀 기회를 더 늦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배경 출처: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