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생각하며.

by nay

몸이 좋지 않아서 충동적으로 월차를 냈다. 사실 어제 이미 출근하기가 싫었는데 꾸역꾸역 나갔다가 와보니 하루 그냥 맘 편히 쉬는 것이 좋겠다 싶어진 것이다. 다음 날이 월차라는 사실에 마음이 한껏 편해져서 침대에 누울 때도 부담이 없었다.


드디어 오늘. 갑자기 주어진 하루의 휴가. 막상 회사를 안 가긴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혹시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회사 앱을 열어서 메일을 살펴보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금세 닫았다. 급하면 따로 연락하겠지. 메일을 미리 본다고 해결될 일이 있으랴.

뭘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허리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기로 했다. 지난번 디스크 때문에 주사치료를 받아서 훨씬 나아졌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웬걸, 얼마 가지 않아 통증이 다시 도졌다. 담당의사가 시술을 권하길래 최선인가 싶어 이 병원 저 병원 투어를 하고 나니, 시술보다는 도수 치료가 낫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생각난 김에 아침에 전화로 예약을 잡고 병원을 찾았다.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이 나를 위해 온전히 쏟는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파 병원에 왔는데 고작 그것이 날 위한 시간이라니, 참 소박한 발견이요, 기쁨이다.


그러면서 만약 오늘 병원에 오지 않았다면 뭘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물론 작정하고 어디 가려는 의도가 있는 휴가도 아니었고 갑작스레 생긴 하루지만, 정작 무엇을 할 수 있었나 물어보면 딱히 '이거요'하고 내놓을 답이 없다. 평소 시간 나면 해봐야지 싶은 후보가 없는 것이다. 쇼핑을 좋아하면 집 앞 백화점과 아웃렛 투어라도 할 텐데. 맛집을 좋아하면 주말에는 가지 못하는 유명한 식당을 찾아가 보기라도 할 텐데. 커피샾에 가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바깥 구경하면서 멍 때리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책을 좋아해서 서점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요,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어 마음껏 오늘 하루 밀린 음악 듣기..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대체 나란 사람은 여태 무엇으로 살아온 것일까?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시간이 나면 하고 싶은 무엇을 떠올리지 못하는 나.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울적해지는 것이다.


얼마 전 <나 혼자 산다>에 박재정이란 가수가 출연했다. 그는 수원 FC의 찐 팬이어서 각종 굿즈를 수집해서 방 안 가득 전시해 놓았다. 수집한 아이템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이 무척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다른 출연자가 '저렇게 어떤 하나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라고 하는 말이 콕 날아와 박혔었다. 멀리서 찾을 것 없다. 주변에도 건전한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철인 3종을 하는 동기 형, 시간 나면 열심히 골프장을 찾는 동료, 꾸준히 아들과 함께 레고를 조립하고 모아두거나, 그림을 그리고 식물을 열심히 가꾸는 동료까지. 몰두할 수 있는 무엇이 있는 것, 그것으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멋지다. 하긴 처음부터 취미나 여가 생활을 하는 아이템이 없던 것은 아니다. 대학원 시절, 사진 취미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데 도움을 주었었다. 그 당시 어머니가 너는 사진 취미가 있으니 참 다행이다, 계속해봐라 하시면서 '아버지는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다 못하셨는데... ' 하고 말끝을 흐리시던 기억이 있다.


우리 삼 남매와 할머니까지 6명의 대가족을 위해 당신을 위한 시간을 포기하신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매우 행복한 사람이다. 7년 전, 회사에서 10년 근속자를 대상으로 부여한 2주의 휴가로 유럽여행을 홀로 다녀왔었다. 처음엔 가족 여행을 계획하다가 도저히 견적이 잘 나오질 않아서 고민하는 나를 보더니 아내는 쿨하게 혼자 여행을 독려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고 미안하고 감사하다 (딱 하나 지킬 것이 있었다. 다른 여자들과 절대 대화 금지). 그렇게 해서 태어나 처음으로 2주라는 긴 시간을 홀로 여행해 봤다. 첫 일주일은 솔직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싶었는데, 갈수록 여행 속으로 집중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스위스의 장엄한 자연 풍경에 압도되었던 기억은 생생하다. 당시가 선명한 것은 당연히 잊지 못할 체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모든 일정, 시간, 장소에서 내가 주도하고 마음대로 뭔가 해볼 수 있었던 것이 좋아서였지 싶다. 힘들면 그냥 가다가 쉬어가면 된다. 오랫동안 전시장을 맘껏 누비며 다녀도 누가 재촉하거나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고 채근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간과 시간이 날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회사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부여받는 역할과 책임. 회사에서는 책임질 일이 많은데 통제권이 없어 많이 답답하다. 수시로 대응하는 일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요즘 스트레스가 꽤 쌓였다. 집에서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필요한 일이 있다. 티 나지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일들. 혹자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스스로 힘들어지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라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군말 않고 그런 책임들에 대해 나름대로 충실하게 잘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병원 한가운데 누워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떠올리는 것을 보니 정작 자신은 별로 챙기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니까 뭐 그리 대수냐 할 수도 있겠다. 물론 특별한 무엇을 해야만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야 말로 더 의미 없지 않을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 두어야겠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시간이 주어지면 당황하지 않고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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