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라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그 분야의 탁월한 연구자를 파악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학계에서는 보통 Big Guy(대가)는 명칭을 붙입니다. 뛰어난 연구자로서 어떤 이론을 만들거나 확립, 또는 특정한 주제의 연구에서 눈에 띄는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내다보면 저절로 큰 사람(Big Guy)이 되는 겁니다. 이런 연구자들은 그쪽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겐 동경의 대상이며 전 세계 많은 박사 학위자들이 가고 싶어 하는 연구실로 소문이 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수가 되려면 좋은 연구 실적(논문)이 반드시 필요하고, 같은 노력을 들인다면 좋은 결과를 얻기 쉬운 곳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모든 연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Big Guy들 중에는 이미 연구에서는 손을 놓은 지 오래되었음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후배 연구자들이 그 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구 성과를 냅니다. 이 동네에도 나름대로 쏠림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래 지도교수에 대한 오래된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God과 같은 교수는 너무 바빠서 만날 기회조차도 거의 없을 겁니다.
조금 시야를 좁혀서 제가 몸 담고 있는 피부 연구에도 나름대로의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라는 수사를 굳이 붙이는 이유는 연구의 영역(대상)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만히 볼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Big Guy가 될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어떤 연구 주제를 제안할까, 또는 현재 연구에서 어떤 성과가 있는가 알아보는데 가장 빠른 방법은 논문을 찾아보는 겁니다. 꽤 괜찮은 연구, 인사이트가 많은 논문의 저자에 꼭 빠지지 않는 사람이나 연구실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니 딱 내가 찾는 일을 벌써 해놨네? 이런 생각이 들고 저자를 살피면 역시나 그 사람입니다. 피부 분야도 세부적으로 쪼개면 다양해서 표피 연구의 대가, 진피 연구의 대가, 모낭 연구의 대가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논문을 읽고 연구를 할수록 대가들이 궁금해지게 됩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그를 만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는 바로 학술학회입니다. 알아주는 연구자들은 저절로 학회에서 키노트 또는 기조연설이란 것을 하게 되지요. 꿈에 그리던(?) 바로 그의 강연을 들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먼발치에서 보고 어, 사진이랑 좀 다르네 하는 경우도 있지요.
저도 동경하는 연구자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드러내 놓고 네트워킹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명인은 학회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든요. 주변 연구자들에게 늘 둘러 쌓여 있고, 아는 사람도 많아서 항상 바쁩니다. 보통 서양 사람들은 말도 많잖아요. 이미 얘기 다 끝난 것 같아서 뒤에 서서 인사라도 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끝나지를 않습니다. 뭐 그리 즐겁게 할 말이 많은지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과 영어의 압박을 무릅쓰고 인사를 나눈 몇 명의 연구자들이 기억납니다. 그들에게 저는 지나가는 one of them이었을 것이지만 제게는 잊지 못할 한 순간입니다. 용기 내어 '나 한국의 OO 회사에서 일하는 nay라는 사람이야'로 말을 걸고 명함 하나 건네면 가끔은 그날 해야 할, 아니 이번 출장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뿌듯함이 몰려옵니다. 그러고는 보고서 맨 끝자락쯤에 '네트워킹'이란 이름으로 자랑스럽게 몇 줄 적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좀 부끄럽기도 하네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이벤트들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이 사실입니다.
독일에 있는 Jean Krutmann이란 연구자가 있습니다. 이 아저씨는 우리 분야에서 되게 탐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큰 회사와 많은 공동연구를 하고 논문 발표도 상당히 있었지요. 때는 바야흐로 2011년, 한국에서 세계 피부학회가 열렸을 때입니다. 놀랍게도 이 사람이 회사에 연락을 취해서 너희와 공동연구를 해보고 싶으니 미팅을 하자고 했답니다. 왜 그랬는지 전혀 알 수 없는데 미팅에 저와 다른 담당 연구원 한 명, 이렇게 둘이 나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팀장급에서 대응을 했어야 할 일인데 참 의아합니다. 어쨌든 저는 엉겁결에 유명한 연구자와 미팅을 하여 그 자체로 영광이었다는 얘기(하지만 공동연구는 못했다는 슬픈 후기).
오늘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Jean 아저씨를 동경해 왔다며, 학회 가서 사인받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크게 동감하여 덕분에 우리 업계 또는 학계의 대가들을 떠올려 봤네요. 글을 쓰다 보니 그들과 만나 인사 나누었던 기억이 생생해서 소름이 살짝 돋았습니다. 연구자에겐 역시 연구의 '대가'가 아이돌이나 다름없지 않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