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구 백서라는 것을 썼습니다. 백서는 원래 어떤 사건에 대해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 분석하고 기록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일 년 동안 일을 했고 그중에서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것들을 추렸습니다. 동료들에게 쓰자고 제안했고, 많은 부분은 당연히 담당자들이 써 주어서 함께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일을 하는 부서임에도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끼거나 보람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 인식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 업무의 성격이 빠르게 처리하여 지나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을 잘 뜯어보면 의미 없는 행동과 결과는 없습니다. 단순히 개별 업무보다 공통된 주제로 묶었을 때 더 큰 의미를 찾는 과정, 인사이트와 교훈이 있기 마련이지요. 또 그렇게 모아두면 하나의 사료, 즉 이 분야 업무의 역사로서 큰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막상 내 일을 그렇게 기록해 둘 가치가 있을까? 이런 생각 하기 쉽습니다. 더 솔직하게는 쓸 것이 없거나 많지 않다, 또는 이미 (연말 즈음에) 많은 발표로 다 해버린 얘기를 왜 다시 기록하라는 것이냐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록하기 싫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정말 귀찮고 쓸모없는 것이라서? 회사 일에 그런 일이 없지는 않지만 쓸모없는 일로만 가득 찬 업무를 한다면 조직이나 개인 모두에게 있어 그것 자체가 위험스러운 상황일 겁니다. 저는 한 편으론 기록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된 것만 보여주기에도 바쁜 마당에 왜 불필요해 보이는 이야기를 모으고 담론을 꺼내려하느냐고 말이지요. 좋은 결과만 모아서 보여주는 슬라이드 몇 장이 더 가치있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역대 왕들의 사례를 반복하지 말라는 반면교사의 목적이 컸습니다. 그래서 사관을 두고 가급적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적시하는 원칙을 두었지요. 그게 지켜지지 않은 사례들도 있습니다만 본래 의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과거에 연구 보고서라는 명목으로 한 해의 업무를 모으고 자산으로 만든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각종 발표가 생기면서 발표 자료로서 갈음하거나 평가 자리에서 끝내고만 말았지요. 다른 형태의 보고 자료로 업무를 정리하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게다가 일이 너무 많고 바빠졌어요. 일 년을 마무리하고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백서 형태의 솔직한 보고서? 그걸 쓸 이유나 가치가 있을까?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보고서의 이름을 '백서'라고 한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던가요. 회사의 연구라는 것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시도와 실패는 기록되지 않고 잘 된 일만 남지요. 후임을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기업의 신화적 스토리보다는 그 뒤에 있었던 진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서로 달랐던 생각과 토론의 내용, 어떤 실험 결과에 대해 잘 나온 결과보다 쟁점이 되었던 부분, 의도와 달리 나온 결과에 대한 해석, 담당자로서 개인적인 의견 등등.. 실무자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담기는 것이 백서의 백미라고 생각했습니다. 잘된 결과들이야 자랑스럽게 밖으로 노출하면 되고요, 인트라넷에 남겨야 될 것은 그렇게 모아서 정리하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전히 제 의도와 백서의 가치에 대해 소통과 설득이 불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 수행 내용과 보고서로 작성된 내용의 괴리가 꽤 컸습니다. 어떤 동료는 '말로 하면 쉬운데 글로 쓰려니 어렵다'는 토로를 하기도 했지요. 맞습니다. 문서 작업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두고 안 할 것이 아니라 더 연습하고 잘 써야 하지 않을까요.
기록하는 어려움과 귀찮음은 충분히 이겨낼 가치가 있습니다. 기록은 현재나 과거를 향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행동이거든요. 게다가 기록은 기억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왜곡, 변형된 기억보다 정직한 기록의 가치에 더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없더라도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가이드가 될 겁니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보이기를 바라지 말고 회사와 후배를 위해 솔직한 내용을 담을 의무가 있습니다. 올 상반기쯤에 타 부서에서 예전 보고서를 잘 봤다며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물어보더군요. 대충 이런 일들이 보고서의 가치겠지요.
맨 처음 썼던 연구 보고서의 말머리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이 과제는 고객의 감동과 회사의 이익을 위해 수행하였습니다"
전형적이고 투박하지만 뭔가 찡한 구석이 있는 글귀입니다. 선배들이 시도했던 유산이 헛되지 않도록, 그리고 오늘의 실수를 후배들이 교훈 삼아 더 나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기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