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연구직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연구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직업의 본질이 뭘까요?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스스로 연구를 기획하고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연구직의 본질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한 것 같지만 뜻인즉슨, 어떤 기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회사든 사회든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는 것이지요. 회사원을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라는 2개의 큰 카테고리로만 나누어야 한다면 스페셜리스트가 연구직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 시절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대학원생은 연구가 본업이지만 현실은 자기 연구 외에 실험실의 잡다한 잡무를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가끔 정부과제를 하게 된다면 며칠 동안은 집중해서 서류 작업에 매달려야 할 때도 있지요. 회사 일은 더더욱 연구 자체에 대한 집중의 시간을 갖기 어렵습니다. 각종 회의에 불려 가야 하고, 연구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발표를 해서 승인도 얻어야 하고, 때로는 사내 펀드를 따기 위한 도전도 필요합니다. 보고서에, 상사와 면담에, 타 부서의 요청에 대응하는 등 이것저것 할 일이 많습니다.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슬라이드를 만들다 보면 내가 뭐하는 사람이었지라는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입사할 때 가졌던 OO 기술의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꾸준히 가져가는 사람,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전공은 아니었지만) 전문가로 성장한 사람처럼 진짜 스페셜리스트가 주변에 꽤 많습니다. 연구소니까 당연한 것이죠.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연구소라고 기술전문가만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같이 연구자로서 색깔은 많이 잃어버리고 사람 관리, 프로젝트 관리가 주된 업무인 연구원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 관리, 프로젝트 관리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직접 해보면 연구보다 더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연구의 가치가 있는 영역이랄까요.
연구는 자신의 노력과 시간으로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아,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부서 간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내 맘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기본 값이지요.
저는 입사하고 한 3-4년 정도까지 스페셜리스트로 있었지만 이후 작은 조직부터 시작해서 각종(?) 크고 작은 조직과 과제를 담당하면서 리더급으로 성장했고 제너럴리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연구소에서 일하는 회사원은 분명한데요. 누군가를 만나 '당신은 회사에서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볼 때 OO 기술을 연구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답이 쉽게 나오지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연구하는 회사원입니다'가 그리 틀리지도 그렇다고 딱 들어맞지도 않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왔습니다. 10년 넘게 관리직 직업이 된 연구자라고 할까요. 그러면 저는 연구자일까요, 회사원일까요. 여기에 수없이 적어 둔 '연구직'에 대한 글에서 연구 자체에 대한 살아 있는 이야기가 조금 느슨하거나 생동감이 덜한 것은 어쩌면 너무 과거의 이야기이거나 주변의 관찰자로서의 입장 때문일 겁니다.
제너럴리스트를 비하하거나 현재의 업무에 불만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난이도가 높은 만큼 매니징은 꽤 고급 스킬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과학보다 어려운 것은 명쾌한 답안이 있지 않고 사람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부서와 개인 사이의 갈등과 이슈를 적절히 조율하는 것,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징징대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이끌어 내는 것은, 회사의 스페셜리스트들이 과학의 힘으로 연구 개발하는 솔루션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나 전문 분야에서 인정받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너럴리스트, 매니저급으로 경로를 틀면 결국 직급과 승진의 사다리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합니다. 경쟁에서 뒤처질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감 역시 큽니다. 상대적으로 스페셜리스트는 자기 분야에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경쟁할 수 있지만 승진에 대한 부담이나 사내 정치 등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는 반면에요.
기술직을 하다가 관리직으로 올라갈 것인지, 계속 기술직으로 승부를 볼 것인지 고민하는 연구원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는 2 track 모두 최고의 자리(임원급)를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직급을 떠나 일을 하면서 자기 성장을 느끼고, 자존감을 지키는 방향이 어디일까 선택할 때가 분명히 찾아옵니다. 아직 연차가 낮고 많은 가능성이 열린 상태라면 스페셜리스트든 제너럴리스트든 모두 회사에 자기 할 일이 있으니 가능한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앞날은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능력을 뒤늦게 발현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