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일종의 자기 고백인 글이다.
현 직장은 나의 첫 직장이고, 햇수로 13년째를 맞고있다. 뒤돌아 보면 분명히 힘든 시기가 있었다. 사람 때문에 힘든 적도 있었다. 딱 1년 간, 회사에서 (안좋은 의미로) 유명한 상사와 지냈던 때다. 하지만 입사 이래 작년 말부터 올 초반이 가장 힘든 때 였다. 보통 회사에서 힘든 이유가 '사람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힘들었던 이유는 일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갈등 때문이었다.
몇 번 언급했지만 나는 연구직에 있다. 회사의 특성 상 연구직일지라도 전략, 방침, 연구의 내용 등이 영향을 받는다. 나 역시 당연히 그런 면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 내가 가진 능력을 '프로답게' 보여줘야 하는 곳이다. 그런 마음으로 지난 10년 간 한 쪽 분야에서 일을 해왔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해서 조직에서 인정도 받고, 논문도 꼬박꼬박 내고 있었고, 앞으로의 플랜도 잘 세워두었다 (어떤 연구를 해야겠다는 주제, 앞으로 나아갈 방향 등등을 말한다). 그리고 그걸 실현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작년 초, 윗선의 판단에 의해 갑자기 그 동안 해오던 일과는 달리 전혀 다른 연구영역으로 이동 당했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그 연구에서 당시 사내 주요 프로젝트의 마무리가 필요한 시점이라 이것 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과제의 성공을 위해 일을 받아들고 진행했다. 문제는 그 다음.. 하던 일은 그대로인데 이번엔 아예 부서 자체를 옮겨 버렸다. 물론, 이것도 나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많이 혼란스러워졌다.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 아닌데. 회사에서 커리어 관리를- 대단하지는 않아도- 차곡차곡 쌓아오던 내 계획이 전면 수정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어떤 선배는 좋은 기회라며, 새로운 일을 잘 배워두라고 다독여 주었지만 이미 마음은 갈피를 못잡고 윗 사람에 대한 불만과 불신,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 나아가서 조직에 대한 불만으로 커져갔고 누군가 '요즘 어때?'하고 물을라치면 '재미 없어'라는 대답이 진심에서 튀어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 달라진 점이 있다. 내가 당장 일을 바꿀 수 없다면, 일을 제대로 해보리라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작년에 주어진 과제를 얼떨결에 완료했지만 그건 이미 갈 방향이 정해진 일을 아름답게 마무리 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나만의 관점이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갈 방향을 못잡는 이유를 차분히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내가 이 분야에 아는 것이 없고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해도 재미가 없을 수 밖에 (이 일을 겪으면서 자신감이 없으면 일의 재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논문을 보기 시작했다. 뭔 일을 하려면 남들은 뭘 했는지 알아야 한다. 뭐라도 알아야 남들과 디스커션 할 때 한 마디라도 거들고, 나 스스로도 하고 싶은 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나만의 절박함이 만들어졌다. 매일 한 편 정도 논문을 보고 나니 슬쩍 자신감도 생겼다. 그리고 대충 돌아가는 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이 해오던 연구가 아닌 내가 기획하는 연구 주제를 제안해서 '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을 만드는 건 지난 10년 넘게 내가 터득한 노하우가 있으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슬슬 재미가 붙는다. 물론 아직도 고민은 남아있고, 조직 문화가 이전에 있던 곳과는 매우 이질적이라 적응의 문제가 여전하다. 하지만 이렇게 엉뚱한(?) 상황에서 나 스스로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회사에서 나를 단련시키는 좋은 기회라고 믿고 있다.
결론적으로 내가 어떻게 이 어려운 상황을 돌파했는가 돌아보니, 내가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끌고 가는 순간부터 turning point가 생긴 것임을 깨달았다. 순서 상으로 따지자면 절박함이 먼저였고, 그걸 채워주기 위한 관련 지식의 습득이 그 다음이었다.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끌고 올 수는 있다. 언젠가 후배들에게 오늘의 이 경험을 잘 전달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