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들어가고 아직 캠퍼스가 쌀쌀하던 무렵, 2학년 선배 누나가 대뜸 과외를 하지 않겠냐며 제안을 해 왔다. 하얀 얼굴에 눈이 동그랗고 키가 작고 귀여운 이미지를 가졌던 누나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과외 소개라니. 게다가 자기가 하던 건데 사정이 생겨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촌 동생과 친구의 그룹 과외라고 하였다. 인당 30만 원이라서 두 명을 가르치면 60만 원의 돈이 생기는 것이었다. 지금도 작은 돈은 아니지만 당시 대학생에게는 큰돈이었다. 서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시절에 선배 누나의 고마운 제안은 무척이나 의외였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부담이라면 소개자의 친척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 정도.
나중에 친한 선배로부터 들은 얘기는 '똘똘해 보여서'가 과외 선생님으로 간택의 이유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무 살의 나란 인간은 별 볼일 없는 찌질한 모습이었음이 분명한데 나름의 매력은 있었나, 뭐 그런 괜한 생각도 해 본다.
여하튼 그렇게 고액의 과외를 시작하였는데 (지금과 마찬가지로) 사회생활 능력이 부실했던 나는 그저 고맙다는 말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참지 못한 누나는 자기가 소개를 했으니 밥을 사라는 말을 했다. '아 그렇게 하지요' 라며 어찌어찌 날을 잡았다.
정확한 코스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영화를 함께 본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영화 선정은 분명히 내가 했다. 이 글의 제목처럼 '망했던'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다. 그리고 술 한 잔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이러니까 무슨 정치인 레퍼토리인 듯 느껴진다.
약속을 하고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부터 함께 나왔는지 약속된 장소에서 만난 것인지 도통 기억이 없다. 다만 저녁 식사는 신촌 앞에 평범한 철판 볶음밥으로 해결했던 것 같다. 기억을 짜내어 보니 그냥 그런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에 믿어 보기로 한다.
이제 문제의 영화를 이야기해야겠다.
제목은 '산타 상그레'.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영화였다. 우리 제목으로는 '성스러운 피'로 해석되는 이 영화는 지금도 찾아보면 컬트 영화의 지존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나는 당시 컬트 영화에 꽤 심취해 있었다. 남들이 잘 보지 않는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려고 했고, 문제작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의 영화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던, 그러니까 자의식 과잉이던 시절이었다. 영화 자체를 좋아해서 씨네21과 키노를 구독하면서 나름 영화광으로 인식되고 싶었던 때다. 그러니 문제작이라면 시간을 내서라도 꼭 봐야 성이 찼던 것이다.
녹색극장으로 기억한다. 극장에는 당연히(!) 손님이 없었다. 극장은 가장 흔한 데이트 코스인데, 그것도 평일에 어지간해서는 관심도 없고 제목도 모를 그럴 영화를 보러 갔으니 사람이 많을 리가 있나. 텅 빈 상영관, 그리고 영화 내내 제목처럼 빨간 피의 무엇인가가 가득했던, 그래 그 기억은 있다.
유감스럽게도 영화의 줄거리 따위는 진짜 하나도 남이 있지 않다. 그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느낌만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온통 붉은색이 가득했던 이미지의 향연. 글을 쓰다가 궁금해진 까닭에 유튜브에서 트레일러를 찾아보니 아휴 정말 좀 너무했다 싶을 정도의 장면들이 난무한다. 그렇지만 그때 치기 어렸던 나는 무척 열심히 그리고 집중해서 본 건 확실하다.
그러나 제대로 놓친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옆자리에 있던 누나의 모습이 어땠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무슨 얘기를 나눴던 것 같기는 한데 분명하진 않다.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뭔가 볼 만했어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 같긴 한데 긍정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얘는 뭐래, 이런 이상한 영화를 보자고 하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을까.
그렇게 이상한 영화를 보고 나와 신촌 거리를 조금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때는 길거리에 수많은 복제 테이프 노점들이 즐비했다. 악세사리를 파는 리어카도 많았고, 무엇보다 강아지를 상자에 담아두고 팔던 시절이었다. 나를 데려가세요,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좁은 상자 안에서 낑낑 대는 녀석들이 길바닥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던 때다. 강아지는 얼마나 귀여운가. 그걸 지나치지 못하고 귀엽다며 앞을 떠나지 못하던 누나를 기억한다. 또 다른 나의 기억은? 음.. 거기에 동조하지 않고 그냥 내 갈 길 가려고 했던 눈치 없던 나? 그날의 기억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사실은 정말 한참이 지나고 나서 어느 날 불현듯 그날이 떠올랐던 것이다. 대학 때 그런 추억도 있었지.. 하다가 아, 그게 데이트였어! 그런데 이건 이불 킥 감이야! 부끄러운 과거야, 그런 깨달음이 왔던 것이다. 첨언하자면 그렇게 못난 후배에게 가끔 누나의 관심이 보였었기 때문에 적어도 내게 관심은 있었구나 확증 편향해 보는 정도다. 그 관심은 딱 5월 축제 기간까지 였다.
어쨌든 그렇게 나의 공식적이었던(그렇게 믿고 싶은) 첫 데이트는 싱겁게 끝이 났던 것이다. 첫 데이트의 환상이나 아련한 기억 보다는 부끄러운 기억을 동반하고 말이다. 예상하다시피 다시는 그 누나와 단둘이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지 않았다. 동기들과 노는 것이 더 즐겁기도 했고 연상보다는 동갑이 더 좋던 시절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이유일 것이다. 재수를 했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휴학을 했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학번은 하나 위였지만 나이로는 그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이후 누나는 휴학을 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졸업을 하고 대학원, 회사..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 더더욱 만날 일이 없었다.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기에 무엇보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피 철철 흘러넘치는 이상한 영화를 소개했던 후배를 혹시 기억한다면 그저 애가 철이 없어서 자기 생각만 했구나,라고 이해해 주기 바라본다. 그땐 내 딴에 좋은 영화를 함께 하고 싶었던, 그런 맘도 있었던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