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 닿았다. 해외에서 복귀 후 첫 해였고 새로운 업무,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 조직에서의 살이가 이렇게 끝나간다. 같은 파트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얼굴만 아는 사람도 있었다. 업무와 사람 모두에게 빨리 적응해야 했기에 열심히 1대 1 미팅을 했다. 즐겁지만 두려운 작업이었다. 때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고, 빨리 끝내고 싶은 불편함이 있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준비했지만 끝내 넣어둔 것도, 용기 내어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꾸준히 해야 했던 이유는 동료와 유대감을 만들어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대감을 다른 표현으로는 '심리적 거리'라고 부르기로 한다.
내게 있어 동료와의 심리적 거리란, 하고 싶은 말을 - 아주 편하게 대놓고 하긴 어렵더라도 - 용기 내면 할 수 있는 정도를 측정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갈등은 별 것 아닌 이유로도 생겨난다. 사전에 갈등 자체를 막고자 함이 아니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하고, 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관계 형성이 필요한 것이라 믿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약점이 되진 않을 거야'
'오해가 있다면 풀 수 있어'
'100% 받아들여지지는 않더라도 나는 요구 사항을 말할 수 있어'
'저 사람에게 솔직한 조언을 듣고 싶어'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
그렇지만 내 마음은 이율배반적이다. 저런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다한들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즉 감정적인 교류에 대해서는 적당한 선을 긋고 싶어 진다. 만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수다를 떨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 기승전 회사 이야기가 주제일 뿐이다. 우리는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니까.
이 표현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내가 기대하는 심리적 거리의 최선은 서로 업무적으로 필요한 것, 불편한 사항, 함께 고쳐가야 할 것 등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음이다. 난 너의 이런 점이 좋아, 이런 건 마음에 들지 않아라고 할 수 있는 주제는 일과 회사에 얽힌 것이어야지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일 때문에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고민을 나누는 사이일 뿐이다. 크게 기대하지도 말고 기대와 다르다고 낙심하지도 말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람에게 믿음을 주었다가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던가?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의 퇴사를 설명하던 친구에게 배신감을 가졌던 적이 있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회사에서 보여 준 뜻밖의 모습에 실망한 적이 있었고, 꽤 성실해 보였던 사람은 회사 비용을 남용하고 결국 퇴사를 했었기에 무척 놀란 적도 있었다. 부서를 옮기고 싶어 하는 후배의 요구에 나름 쿨하게 고민 끝에 결정한 사항을 존중해 준다고 했더니 잡는 척도 안 하더라는 말을 들었었다. 인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의식 속 어느 한 구석에는 경험이 만든 나름의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란 사람은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인간관계를 원하는 사람이라서가 더 명확할지 모른다.
개인적인 경험은 차치하고 다시 1대 1 미팅의 결론으로 돌아오자.
내 의도와 기대만큼 성공적인 관계 형성 - 심리적 거리 - 이 되었는지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단적인 에피소드 한 가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연구 백서의 한 주제를 담당했던 사람이 쓴 보고서가 못내 아쉬움이 있었다. 이 정도로 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쓰기 싫었나 보다 싶었다. 처음 하는 것이니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했었다. 이번에 미팅하면서 갑자기 생각난 김에 물어봤다. 솔직히 좀 귀찮았던 거죠? 그게 느껴졌어요, 라는 어떻게 보면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한 편으론 나 역시 이 정도는 이제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답변은 나를 당황시켰는데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명확했다. 연구가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서 현재 결과만으로 어떤 결론을 내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한계가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면 저한테 얘기하시지. 그러면 다른 주제를 생각해 봤을 텐데요. 아직 그런 말 못 하는 사이인가요’
‘그래도 고민해서 이런 주제를 주신 거니까, 저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한 거였어요’
미안했다. 작은 오해와 실망을 막판에 이해할 수 있었고 나는 그에게 아까 했던 실망감에 대해서는 취소한다고 말해야 했다.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과정은 솔직한 대화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6명과 각각 한 시간 가까이 올 한 해는 어땠는지 소감과 내년의 기대를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아무도 나에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만나자고 한 사람은 나였으니 질문자도 나였고, 제안하는 사람도 나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일 년의 끝에 덕담까지는 아니어도 리더에게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해도 좋지 않나 싶구먼.
그러나 정말 놀라운 일은 생기는 법. 그런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임했던 마지막 미팅에서 이야기가 끝날 무렵, 함께 이야기를 나눈 동료가 나에게 'OOO님은 올 해가 어떠셨어요? 궁금해요'라고 질문을 던져주었다. 복귀해서 다시 이런 일을 해보니 어땠는지, 일 년은 어떻게 보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는 그의 질문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작게 남았던 앙금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도 사람인지라 서운함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어쩌면 일로 만난 사이임을 전제로 하여 덜 상처 받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핑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다시 정의해 본다. 일로 만나 사이라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어쩌면 좁혀질 이유가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