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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심으로 버팁니다.

by nay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그러니까 아직 30대 중후반 시절 일이다. 바로 앞자리는 팀장님이었는데 가깝다 보니 오고 가며 본의 아니게 책상 위를 훔쳐볼 기회가 많았다. 그 당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쪽에 가득 놓인 각종 영양제와 약이었다. 쌓아 놓고 안 먹는 사람도 많은 편이지만 이 분은 열심히 챙겨 드시곤 했다. 한가득 손에 덜어서 털어 넣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 줄까?' 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었다. 실제로 물어보신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에이 아니에요 하면서 손사래를 쳤었다. 그러면 나를 보며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40대는 약심(힘)으로 버티는 거야"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의 뜻을.


마흔을 막 넘겼던 다른 선배는 '마흔을 넘으니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며 어디도 아프고 어디는 삐끗한다는 툴툴거림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평소에 앓는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었기에 귓등으로도 듣질 않았다. 또또 저런다, 하소연하는군 이런 생각만 했었다.

그때는 몰랐다. 진위 여부를.


과연 마흔이 넘어가니 매년 정기 검진 결과가 나올 때면 마음올 졸이게 되었다. 종합 소견에 적히는 내용이 해가 다르게 늘어갔다. 한 줄 한 줄 무슨 나이테 마냥 생기는 것이 처음엔 그렇게 이상하고 마음에 받아들여지질 않다가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이 나이에 혈압약은 당연한 것이고 디스크며 관절이며 난리다.

어머니가 올 초 척추 쪽에 큰 수술을 하셨다. 70년 넘게 기계를 썼는데 그게 고장 안 나면 이상한 거지, 이런 당신의 말씀이 대충 하는 한탄이 아님을 잘 알게 된다. 하긴 그 말이 맞다. 신체를 이루는 구성 장치들 - 뼈와 각종 장기, 연골 등등 - 이 오래될수록 자기 기능을 제대로 못하거나, 하더라도 기능에 제한이 걸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아내 덕분에 영양제를 챙겨 먹고 있다. 유산균을 시작으로 비타민, 마그네슘, 코엔자임 Q10, 콜라겐 등등 종류도 많고 챙길 것도 많다. 아침에 먹는 것, 저녁에 먹는 것 종류별로 잘 먹어야 한다. 남편 건강 챙겨주느라 재고 떨어질 때 되면 따박따박 주문해서 채워주는 것이 고마워서 먹는다. 먹지 않으면 쌓여 있다가 상하거나 오래되어서 버려질까 봐 억지로 챙겨 먹는 이유도 있다. 그런데 솔직히 먹어서 정말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영양제의 효능 효과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잘 아시는 분 설명 좀). 이런 의심은 경험에서 온다. 영양제 먹으면 덜 피곤하다던데 깜빡하고 먹지 않은 날이나 열심히 먹은 날이나 별 차이를 모르겠다. 마그네슘 먹으면 숙면 취한다던데 웬걸 어떤 밤엔 새벽부터 정신이 말짱해지는 것이다. 너무 잘 자서 일찍 깬 건가? 그러면 내가 기대한 효과가 아닌데 말이다. 마케팅에 속은 것인가 싶어지면서 불신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라도 꼭 먹게 되는 것은 이거라도 안 먹으면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까 봐라는 이유에서다. 영양제 빨로 지치지 않게 일어서야 하는 하루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버텨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약의 힘으로라도 버틸 수밖에 없는, 버텨내야 하는 40대 가장의 무게를 느낀다. 이제야 '약심으로 버텨내던' 40대 선배 팀장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30대의 나는 조금 더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왔었다. 그래도 되었으니까, 아무 문제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서른다섯에 아이가 태어났다. 겨우 초등학생일 뿐이다. 아내는 일을 하고 있지만 건강이 썩 좋지 않고 우리의 노후는 너무 막연해서 은퇴 전에 이뤄내야 할 많은 과업 같은 일들이 산적해 있다. 평소에 이런 생각과 스트레스를 의식하며 살아가지는 않지만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열심히 챙겨 먹는 이유가 단지 아내에게 고마워서, 약의 유효기간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싶어 진다. 인식하지 못하던 생존의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약심으로 버텨본다.

나를 위해 화이팅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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