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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모르는 가족의 취향.

by nay

작년에 큰 마음먹고 아이에게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공개한 뒤 아내의 제안이 있었다. 비밀을 간직하던 산타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이제는 뽑기를 통해 선물해 줄 사람을 정하고, 함께 쇼핑몰이나 상점에 간 뒤 일정한 금액 안에서 구매해서 전달해 주자는 것이었다. 인터넷 구매는 금지. 무조건 현장에 함께 가서 물건을 고르기로 했는데 아들이 제법 커서 엄마나 아빠가 함께 다니며 선물을 고르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었기에 이런 이벤트가 가능해졌다. 뽑기를 통해 서로의 상대를 정하는 것이므로 일종의 마니또 같은 기분도 들고 누가 내 선물을 해줄까, 나는 누구에게 선물을 사야 하나 고민하는 즐거움을 가질터 였다. 이 연말 행사를 시행해 보니 재미도 있고 서로 반응도 좋아서 올해도 하기로 했다. 작년에 나는 아들을 뽑았고, 아내는 나를, 아들은 아내를 상대로 선물을 주었다.

이번에는 서로 다른 사람을 뽑고 뽑히기를 바랐는데 공교롭게도 작년과 같은 매치가 되었다. 3명 밖에 안되는 가족 구성이다 보니 경우의 수가 제한적이긴 하다. 새로 뽑을까를 얘기하기도 했지만 그냥 뽑은대로 하기로 했다. 다시 하자니 그건 또 귀찮은 것이지.


12월엔 결혼기념일도 있어서 연말은 은근히 가족 행사의 기분이 있다. 집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은 건물에 있는 교보문고에서 선물을 고르기로 했다. 상한선은 2만원. 호기로운 마음으로 쉽게 선물을 고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갔지만 의외의 어려움이 닥쳤다. 대체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준비 없이 갔던 티가 너무 났다. 서점이니 무턱대고 책을 사주면 성의 없어 보였다. 문구를 고르자니 이미 집에 노트며 펜이며 부족하지 않았다. 농담으로 말 안들으면 문제집을 사주겠다고도 했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는 일. 그러다가 문득 아들이 뭘 좋아하는지,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의 고민은 당황스러웠는데 누구보다 가까이 지내고 매일 부대끼며 살면서도 정작 선물을 고르는데 어려움이 있을지 몰랐던 까닭이다. 현재 제일 잘아는 아들의 관심사는 게임이다. 주말마다 주어지는 게임 시간이 이 녀석이 일주일을 버티는 희망이다. 마인크래프트를 열심히 하다가 요즘 브롤스타즈로 갈아타서 금요일 저녁만 되면 ‘내일이면 게임한다’는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 그러나 고작 게임 외에는 그의 사적인 취향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최근에 학교 발표 때문에 친구와 음악 줄넘기 준비를 2주 동안 열심히 했었다. 같이 했던 친구 이름을 듣기는 했지만 금세 까먹었다. 늘 이런 식이다. 아무튼 아들의 관심사가 뭘까 고민을 하며 돌던 중에 딱 만났는데 어라 이 녀석도 쩔쩔 매는 중이었다. 엄마에게 무엇을 사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게 왜 어려워,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나 역시 아내에게 어떤 선물을 해주면 좋아할까 생각해 보니 상당히 막연했다.

특별한 날이라고 백화점 가서 조금 무리한 수준의 선물을 고르는 것은 오히려 쉬운 편이다. 물론 그것도 예산 범위와 상대의 취향, 당시 필요한 물건의 수준이 맞아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2만원이라는 - 요즘은 밥 한끼와 커피 한 잔으로 끝날 - 예산 안에서 어떤 선물이 좋을지를 선택하기란 참 어려웠다.




평소에 가족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는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걸 생각할 이유조차 떠올리기 어렵다. 매일 얼굴을 보고,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자고, 함께 얼굴 보며 밥을 먹으니 당연히 잘 안다고 믿는 것일 뿐. 정작 상대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적당히 떠올리고 선물로 고르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매일 묻는 질문이 이런 것이다. 책은 읽었는지, 수학 문제집은 다 풀었는지, 책가방은 챙겼는지 할 일에 대해서만 묻고 답을 했을 뿐 요즘 필요한 물품은 없는지, 갖고 싶은 것은 없는지 알고 있지 못했다. 시간되면 빨리 자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무취향의 내가 되는 것이 싫다


한편으로 나는 가족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되는지 궁금해졌다. 아내나 아이에게 '남편(아빠)은 뭘 좋아해?'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 아! 애플 제품. 아니 내 생각에 그건 취향이라고 보기엔 좀 다른 면이 있다. 취향이란 조금 더 디테일한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감동 깊게 본 영화라던가, 좋아하는 책이나 음악, 늘 마시는 커피의 종류, 선호하는 옷의 색깔이나 스타일 같은 것.

어쩌면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나도 모르게 무취향의 사람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끔찍하다. 아이의 공부를 봐줘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의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벼락 거지가 되기 싫어서 경제와 투자에 대한 공부를 해야하는 의무, 회사에서는 적당한 가면을 쓰고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의무와 미래에 대한 짐만 갖고 살아가는 삶은 아닌가 싶다. 지금이 가장 바쁜 때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인만큼 의무로만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보내기는 싫다.

최근 일부러 돈을 들여 애플뮤직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Chet Baker, Mika, 이소라, Michael Buble, Norah Jones, Adele ... 어렸을 때 플레이리스트를 채웠던 그들의 음악을 다시 찾아 들어본다. 이상하게 과거의 감성이 쉽게 소환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을 듣고 즐기던 나를 놓치기 싫은 의식적인 행위이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이 내가 주로 보는 장르의 드라마와 영화 데이터를 분석해서 기가 막힌 제안을 해준다고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정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사람에게 기억되는, 뭘 좋아했었지가 명확한 내가 되고 싶다. 나 스스로도 내 취향이 무엇인지 다시 알고 싶다. 취향이 없는 사람이란 솔직히 매력 없지 않은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달고나 세트. 나이가 어려서 오징어 게임은 보지 못했지만 거기 나온다는 달고나 얘기는 엄청 들었었기에 만들어 보고 싶다, 먹고 싶다 말하던 아들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거다. 받고나서 기쁜 마음에 당장 만들자고 덤벼들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미안하다 아들, 조금 더 너를 알아가도록 할게. 숙제 했냐는 말만 하지 않고 너가 좋아하고 관심 있어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노력할게.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건 관심과 사랑의 증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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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의 이전글일로 만난 사이가 좋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