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말 휴가를 맞이하는 자세

by nay

질문. 학생일 때는 당연한 권리 정도로 생각했지만 사회에 나오니 그게 아니었구나, 소중한 것이었구나 크게 깨달은 것은?


답. 방학의 부재


사회인에게 방학이 웬말이냐, 52시간 근무도 고마운 줄 알아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어찌 사람이 일만 하고 365일, 수십 년을 버틸 수 있겠는가. 비워져야 채우고, 쉬어야 새롭게 활력을 찾아 근무지에서는 더 나은 업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이다.

방학을 하면 학생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되려 선생님이 더 방학식을 고대하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었다. 생각해 보니 그 역시 직업으로서 교직에 있는 것일 뿐이다. 물론 교직 공무원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마음가짐은 분명 일반 회사원과는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으로 돈을 버는 근무자로 봤을 때 일했으니 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방학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절반 정도까지는 항상 즐겁고 매사에 밝다가 어느 덧 개학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크게 낙심한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되었다.


연말에 이틀을 휴가로 쓰기로 했다. 지금 회사에서는 연차를 비롯해 리프레시라는 이름으로 5일, Happy vacation으로 4일 (연차 하나 포함해서)을 따로 쉬게 해 준다. 연차를 제외하면 무급 휴가이다. 그러니 이걸 챙겨서 쓰지 않는다고, 회사에 충성충성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돈 더 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악착같이 남은 휴일 없도록 잘 챙겨서 써버리곤 한다. 반대로 연차는 조금 개념이 달라서 아껴쓰면 아껴쓸수록 연월차 수당이란 명목으로 돈을 받을 수 있다.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라는 것이 하나 있다. 연말(실은 1월 월급날)에 직전 년도의 연월차 수당이 지급되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수년 전 아내와 딜을 했었다. 보통 월급은 가족의 생활비로 쓰이고 우리 집의 경제는 아내 손에 있기에 고정 지출비를 제외한 남은 월급은 그녀의 통장으로 이체가 된다. 연월차에 대한 내 주장은, 이건 쉬고 싶은 것 참아가며 고이 모아 둔 것에 대한 보상인 만큼 내 것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진심이 통한건지 논리가 설득적인건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주장하는 남편의 모습이 귀엽거나 안쓰러웠는지 흔쾌히 그러라고 하여 매년 연월차는 in my pocket 하게 된다.


통상 임금제 도입 전에 연월차 수당이 그리 크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일 때 협상했던 결과이다. 시간이 지나 회사에서 임금 체계가 바뀌기도 했고 연봉 또한 상승한 터에 일당을 따지자면 협상 이전과 현재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즉 생각보다 연월차 수당이 꽤 짭짤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금액이 좀 큰 까닭에 일부만 취해서 용돈 통장에 돈을 보내놓곤 했다. 나머지는 공공의 자금으로 써야 마음이 편한 것이다. 아내는 굳이 얼마가 들어왔으며 왜 그만큼만 보내냐고 캐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주어서 고맙고 현명하다고 느낀다. 그걸 꼬치꼬치 캐서 정확한 액수를 파악하고자 하면 내 행동은 반대급부로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 오늘 휴가라서.


하루 하루가 - 돈으로 환산되어 내 용돈이 될 수 있을 - 소중한 연차를 이틀이나 써가며 12월의 마지막 이틀, 2021년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하는 일은 평범하다. 은행 가고 병원 가고 친구 만나고가 전부이다. 휴가인데 굳이 평소에도 할 수 있는 활동을 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휴가는 그 자체로 상징성이 있다. 1년 내 수고했던 나를 위한 선물이기도 하고, 학생 때 권리처럼 가질 수 없는 직장인의 비애가 담긴 단기 방학이면서, 대신 ‘돈’으로 치환 가능한 시간과 노동의 가치이기도 하다. 내일 아침 침대에서 조금 더 비비적 거릴 수 있다는 편안함으로 잠들 수 있는 자유이다. 다음 날 휴가일땐 괜히 마음이 넓어져서 가족에게 너그러운 사람으로 변신하게 만드는 마법의 약이다. 내 앞에 혹시 쌓일 수 있는 이메일이나 별로 급하지 않은 연락 따위를 ‘나 오늘 휴가라서’의 이유로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일종의 치트키이다.


근속 10년을 했을 때 회사에서 2주의 휴가를 준 적이 있었다. 역시나 멋진 아내의 허락 덕분에 유럽 여행을 혼자 다녀온 기억이 선명하다. 20년이 되면 회사에서 여행권을 준다는데 그땐 아내와 함께 시간 맞춰 좋은 곳에 가고 싶다. 물론 발칙한 상상으로는 20년쯤 회사에 헌신하면 여행권 보다는 한 달 정도 거하게 방학 같은 휴가를 받고 싶다만 그건 어려운 일이겠지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의외로 모르는 가족의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