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예약을 해두었던 치과를 찾았다. 일 년 만의 스케일링을 위한 방문이었다. 이사 후 처음 가보는 곳이라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는데 ‘나이’ 칸이 있었다. 정확한 내 나이가 몇인지 헷갈린다.
'몇 살이었지?'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거침없이 적어 내려가던 펜 끝이 한동안 머물러 있다. 작년에 몇 살이었더라 생각 끝에 올해 나이를 비로소 적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나이를 센다. 어렸을 땐 주로 세는 나이, 즉 가급적 많아 보일 수 있는 나이를 택하여 말한다. 한 살 차이 때문에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걸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만 나이’를 따지곤 한다. 어떻게든 적게 먹은 것으로 하고 싶을 땐 생일을 넘겼는지 아닌지까지 꼼꼼히 따져가며 생물학적 나이를 찾는 셈이다.
동료들과 어쩌다 나이 얘기가 나오면 다들 정확한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들어 신입 사원을 채용하지 않은 까닭도 있고 전반적으로 나이 든 사람들이 쌓여서 그런지 더더욱 그렇다. 어떤 엄마는 둘째 아이의 나이와 꼭 30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기 나이를 계산하려면 아이에게 더하기 30을 한다고 하였다. 자기 나이는 몰라도 아이는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이 어째 좀 서글프게 들리는 대목이다. 그러면 옆에서 다른 동료도 맞아 맞아하면서 자신은 이제 몇 년 생이라고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이를 세는 것을 까먹다 보니 계산하기는 싫고 (반드시 기억하고 있는) 태어난 해로 비교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러자 더 나이가 들면 임술년생, 계미년생 같은 육십갑자를 사용한다고도 하지만 아직 우리 나이 - 40대 - 에 그런 사람은 쉽게 만나 보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나이가 듦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진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솔직히 이제는 정확한 나이가 얼마인지 별로 알 필요가 없다. 성년이 되어야 합법적으로 술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몇 살 이상의 나이에만 할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의 기준선을 이미 훌쩍 넘어버렸기에 굳이 한 살 차이의 아쉬움이 없어져 버린 까닭이다. 스스로 치사하게 집착하는 것은 40대의 중반인지, 후반인지를 따져보는 마음이다. 그나마 올 해부턴 중반이라고 우길 방법이 없다. 빼박 후반이 되어버렸다.
아들의 소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른이 된 후) '아들을 밤에 재워 놓고 자기는 맘껏 TV를 시청하는 것'이란다. 즉 지금의 아빠가 누리는(?) 호사를, 자신이 어른이 되어 그대로 똑같이 가져보고 싶다는 얘기다.
"그건 네가 아빠 아니라 그냥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야"
"아니야 꼭 아들을 재우고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봐야겠어"
아들에겐 나이를 먹는 것이 꽤 괜찮아 보이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생이니 한 살 한 살 먹는 것이 싫지 않을 때이다. 정확히 자기가 몇 살인지 아는 녀석이 귀엽기도 하고 곧장 어른이 되고 싶은 이유가 지나치게 유치하여 대꾸할 가치도 찾지 못하겠다. 그래도 이 친구가 나이를 먹고자 함에는 마음껏 티브이를 보고, 게임을 하고, 유튜브를 시청하고 싶다는 합목적적인 이유가 있다.
어쩌다 보니 어느새 50줄 아래에 들게 되었다. 열심히 채워보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었음에도 저절로 채워져 가는 나이 통장의 잔고가 야속하기만 하다. 더욱이 나이 통장의 잔고에는 굳이 이자 따위 받고 싶지 않다. 직접 찍히지는 않지만 꼬박꼬박 해마다 보이지 않게 변해가는 건강 지표라는 이자가 붙어 속상하다.
‘이제 이 나이가 되면요, 잇몸 건강에도 신경 쓰셔야 해요. 아직은 괜찮지만 관리가 필요하거든요’
의사 선생님 말씀이다. 아, 네... ‘이 나이’에 어쩐지 괜한 서글픔의 방점이 찍히는 하루다. 나이에 둔감해지는 대신 건강에는 예민해져야 할, 그런 나이가 되어 버렸다. 무뎌진 나이의 셈법에, 자기를 챙기는 계산식 하나 정도를 더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