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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May 09. 2022

업무 경험이 자산인 이유

지금 미국에 있는 주재원 후배가 전부터 해외 근무에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사권자는 아니지만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늘 경험(경력)이었다. 일을 잘하는 친구라는 건 누구나 인정했지만 연구가 아닌 조직 매니징이나 업무 관리 경험이 많지 않아 내심 안타깝게 느껴왔었다. 연구직 주재원의 업무는 실무 연구자로서의 perspective나 insight 보다는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그것은 좋은 연구를 위해 주변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부서 간 조율처럼 연구와는 동떨어진 분야의 경험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친구는 미국행 티켓을 얻었고 햇수로 3년 정도 근무하고 있으니 이제는 내 걱정 따윈 필요 없을 대단한 내공의 소유자가 되어 있지 싶다.


최근 해외 업체와 계약서 업무를 처리하면서 귀찮음은 있었을지언정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싱가포르 근무 당시 굵직한 몇 가지 과제 계약 경험이 있다 보니 해외 연구 계약 프로세스를 잘 이해하고 있기에 그렇다. 단순히 프로세스를 충실히 따르는 것 외에 행간의 의미를 알고 있다. 계약서 검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법무팀의 검토 의견이 아니라 계약의 주체인 담당 부서의 결정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처음엔 그걸 모르고 법무팀의 검토 의견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경험, 어쩌지 못하고 중간에서 발만 동동 구른 기억이 있다. 


세상살이에 경험의 중요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회사 생활에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회사의 일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 외에 행정적 절차가 필요한 업무들이 많다. 이들을 잘 모아서 카테고리를 나눠보면 전형성을 가진 몇 개의 그룹으로 묶일 수 있는 것들이다. 과거와 아주 동일한 사례는 없이 변주될 뿐이다. 사례에 비추어 판단하면 의외로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물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도 있다). 과거에 어떤 일을 해봤던 경험,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새로운 상황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인식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연차에서 나오는 바이브, 짬이란 말이 의미가 있다. 


원론적인 관점 말고 각론 - 어쩌면 전문성이 가장 극명하게 발휘되는 - 에서도 경험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예를 들어 소재의 피부 효능을 평가하는 일에서 경험의 가치는 적절한 실험계의 선정(어떤 세포를 사용할 것인가, 어떤 마커를 확인할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troubleshooting의 방향과 해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거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완전히 새로운 일을 대하는 때도 경험은 독이 아니라 도움이 된다.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모르는 일도 부딪혀 가며 해봤던 경험으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롭게 만나는 문제일지라도 어떻게 하면 되겠다 하는 일종의 처리 프로세스가 자연스럽게 그려질 것이다. 과거에 비슷한 과업에 실패했었다면 왜 그랬는지를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프로세스나 매뉴얼이 있으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사실 경험이 전무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낸다. 그러나 경험의 가치는 같은 문제를 얼마나 떠 빠르게 효율적으로 해결하게 만드는 가에 있다. 또한 매뉴얼이나 표준 작업 지침서 같은 문서에는 적히지 않는 디테일한 행간이 있다. 앞서 말한 서류 계약의 경우에도 ‘담당자가 법무팀에 의뢰서를 올린다’, ‘검토 의견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검토 의견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빠름과 효율이 항상 미덕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시간, 자원의 소비를 절약하며 더 의미 있는 시간과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한 것으로 업무의 효율성 재고는 필요하다.


덧. 언젠가 아내가 20대로 돌아가면 무얼 하고 싶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여행을 해보겠다는 답을 했었다. 나이가 들고 어딘가에 몸과 마음이 매인 생활이 길어지니 더 자유로웠을 때 하지 못했던 경험에 아쉬움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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