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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May 17. 2022

18년 차, 조직에서 밀려날 때?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 나의 위치는 중간의 중간 관리자급이다. 이런 어정쩡한 위치에 대해 부연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연구조직의 구조는 연구원 - 연구소(사업부 및 성격에 따른 몇 개의 소) - 팀(랩이라고 명명)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각각 원장/소장/랩장이 공식적인 관리자의 형태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업무 효율성과 편의를 위해 랩장 아래에 실무를 챙기는 중간 관리자가 있다. 각 랩에는 일하는 성격에 따라 사람들을 모아서 파트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 파트에 파트 리더를 둔다. 그게 바로 나다. 보통 중간 관리자를 팀장급으로 부르니까 나는 중간의 중간이라고 부르는게 맞다.

얼마 전 나와 같은 위치의 동료와 이야기 하다가 최근 파트 리더의 변화에 대한 바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야기인즉슨 연구개발의 변화를 기치로 기존의 파트 리더들은 자리에서 내려오고 적당한 후임을 찾아 파트 운영을 맡긴다는 얘기였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생각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마음 속에는 복잡한 심경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첫번째, 불안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지만 그 대상이 내가 된다는 건 반갑지 않은 일이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는 법. 애초에 이 자리가 동료들에 의한 선출직이 아닐 뿐더러 투표에 의해 권력(?)의 유지를 지속하는 것도 아니므로 윗사람이 바꾼다고 하면 할 수 있는 대응은 없다. 받아들이는 것이 적합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불안할까. 중간 관리자로 오랫동안 매니징 중심의 일을 하면서 실무에서 손을 뗀지 오래라는 것이 어쩌면 내 불안감의 가장 핵심적 실체일 것이다. 과연 다시 세포를 키우고 실험하고 결과를 얻는 작업을 잘 할 수 있을까. 적당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헤매는 건 아닐까. 이래라 저래라 하던 사람이 결국 자기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하는 처지였구만, 이런 시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감의 결여라는 본질은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사랑에 대한 갈구’일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불만

변화라는 이유로 경력자의 경험을 무시받는 듯한 상황에 대한 불만이다. 좋게 말하면 경력, 소위 짬밥이나 눈치밥 같은 말로 대변되는 경험의 누적은 일 처리를 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함께해 온 사람들 사이의 네트워크는 당면한 과제를 처리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같은 업무라도 적당한 선에서 끊을 수 있고 협의를 통해 조직 간 갈등을 해소하여 업무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다. 누구의 눈에는 많은 월급 받아가며 실제 기여하는 바가 적다고 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긴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쌓고 체득한 노하우가 있다. 그걸 갑자기 부정 당하는 느낌이 싫다. 이제는 경력 조차 쓸모 없어지는 인력이란 생각이 들면 사실 꽤 슬퍼진다.


세번째, 좌절감

 작은 권력의 위치가 부여하는 부가적인 요소는 그나마 있을 수도 있는 승진 후보자의 마지노선이다. 거기에서 밀린다는  이제 회사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필요로 하는 인재로서 가치를 상실한다는 뜻이다.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하기엔 그게  현실이다. 내가 회사의 운영자라면 어떤 판단을 할까 반문해 본다. 오랜 시간 조직에 기여한 사람을  관리자로  이유나 명분이 반드시 존재하지는 않는다. 세상이 변하고 관리자나 리더의 역량과 능력이 달라진다. 그에 맞는 적합한 사람을 자리에 배치하는 것은 조직 활성화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세대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튼 내가 살아온 시대와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주요 고객이라면 그에 맞는 연구개발을   있는 리더가 있어야 한다. 그걸 이성적으로 아는 것과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일종의 패배감 사이의 괴리는  혼란스럽다.


슬픔의 5단계라는 것이 있다.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으로 전개되는 이 반응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는 지금 어느 단계일까 생각해 본다. Fact만 놓고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벤트이고 어떻게 될지 미래는 모른다. 카더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분명히 던지는 메세지가 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회사를 오래 다니는 것의 미덕, 그 안에서 인정 받고 싶은 욕구, 그렇지 않을 수 있는 현실 인식, 그걸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선배들을 지켜 본 나의 시선이나 막연히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경력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중요하지만 조직의 변화를 위해 누군가의 역할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리고 질문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자리매김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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