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을 하다 보면 진짜 별 것 아닌 일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쓰곤 한다. 아주 간단한 질문 답변에도 ‘감사합니다’가 습관적으로 튀어나온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누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잘했다고, 이걸 마다하지 않고 해 줘서 고맙다고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섭섭해지는 경우가 은근히 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어찌 내 권리만 있겠는가. 의무를 다할 때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주어진 회사 일을 함에 있어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왜 고마워하지 않느냐고 따질 것도 없고, 그걸 지나치게 매번 표현하는 것도 좀 불필요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원래 업무를 하는 건데 도와줬다고 생색 내기도 적당히 할 일이다. 비슷한 이유로 습관적인 감사함, 영혼 없는 표현은 효용성이 떨어진다.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나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듯이 아무 때나 감사 표현을 날려버리면 정작 진짜로 필요할 때 제 역할을 못하는 것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해본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물론 누가 봐도 참 성의 없는 감사 인사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순간도 있다. 예를 들면 이메일 끝에 붙이는 형식적인 ‘감사합니다’는 매번 옳지 않다. 메일 내용 상 전혀 감사할 일이 아닌데도 고맙단다. 읽어줘서 고맙다는 건가? 뭐든 적절한 중도를 찾는 게 쉽지 않다. 나 같은 까칠하고 피곤한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유독 집에서는 감사 표현에 매우 박한 것이 아닌가 반성한다. 집과 회사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만 필요하다면 꼭 배워서 양쪽 어디든 써먹어도 되는 괜찮은 것들이 있다. 사소한 것에도 고마워하는 마음과 그걸 표현하는 것이 딱 그렇다. 따져보니 내가 공식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시점은 아내의 생일 즈음, 연말 즈음이다. 카드를 쓰다 보면 아 그래, 올해도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니 당신도 애 많이 썼구려 하는 감상에 젖는다. 평소엔 감사보다는 주로 지적질만 하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열심히 금리 높은 상품 찾아서 예금이며 적금 드는 모습에, 조금이라도 아껴서 살림에 보태려고 더모아 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아내를 향해 ‘적당히 하라’며 면박할 것이 아니다. 좋은 호텔 더 싸게 묵으려고 이것저것 비교해 보는 모습을 뭐라고 할 것은 아니지 않나. 생활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비록 부딪히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태도를 칭찬하고 고마워할 생각은 대체 왜 못하는가. 사람이 같이 오랫동안 붙어서 살다 보면 많은 것이 무뎌지고 익숙해져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이렇게 된다. 그렇지만 고마움의 방향과 크기마저 꺾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요즘 주변 일로 아내가 힘들어한다. 생일 주간인데도 영 기운이 없다.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 괜히 나도 기분이 처지고 좋지 않다. 삶에 의욕이 쳐질 때 흔히 감사 일기를 써보라고 한다. 내면을 향한 감사 일기도 좋지만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적극적 감사의 힘을 믿고 발휘해 보는 것도 좋겠다. 평범한 일상의 유지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힘든 시기이다. 유동성 넘쳐흐르는 감사함으로 상대의 처진 기분을 달래주며 상한가로 끌어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