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향은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대체 너 없이는 죽고 못 살 것 같은 연인의 사이도 작은 균열 하나로 시작해서 파국을 맞게 되니까요. 사귈 당시엔 서로가 행복한 꿈을 함께 꾸지만 헤어질 땐 지나치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과 속도로 삶을 꾸려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류에 휩쓸려 이렇게 저렇게 부유하는 것 또한 인생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수동적) 관계 지향적 사고’에서 탈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그 관계를 위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아는 것이 어쩌면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여겨왔습니다. 내 마음이, 그리고 누군가와의 관계가 어느 쪽으로든지 설정 된다면 그걸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요.
그러나 말입니다. 상대를 위해, 나를 포기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질문을 해 볼까요? 그러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함께 고려해야 좋은 답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대상이 되는 사람이 배우자인지, 가족인지, 친구인지, 동료인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인지, 교수와 대학원생인지에 따라 질문의 폭과 깊이, 그리고 답변은 달라지겠지요. 단적으로 나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사람에겐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게 또 우리 인생의 서글픈 단면이지요.
그런 수동적 마인드에 절어 있었던 걸까요? 저는 삶이 한쪽으로 치우쳐 지내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다툼으로써 갈등을 만드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인 셈이지요. 관계가 힘들어지는 것을 경계한 제일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나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였습니다. 완벽한 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셀프 이미지에 금이 가는 것이 싫어서였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계속 볼 사람인데, 괜히 내가 나쁜 사람처럼 인식되는 것이 싫어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수단의 하나로 ‘적당한 나의 희생 또는 받아줌’ (또는 그걸 상대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는 가정)으로 생각했던 마음을 바꾸려고 합니다. 윤상의 노래 중에 ‘사랑이란’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좋아해 온 노래로 가사가 아주 섬세하고 삶을 관조하는 맛이 있는데, 딱 적당한 표현이 있어 소개합니다.
애써 지켜야 하는 거라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지
대중가요의 특성상 남녀, 연인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지만 더 넓게는 인간관계에 적용하고 확장해 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써 지킬 필요가 있도록 내가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희생을 요하는 관계라면 그 역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앞선 대전제 – 관계의 방향성 설정 – 를 바꾸면 됩니다. 관계는 늘 틀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죠. 마음 어딘가에 풀리지 않을 정도로 꽉 조여준 나사 한 두 개를 풀어 여유를 두면 내 마음도 분명 덜 불편해질 겁니다. 그 사람이 나를 좀 싫어하면 어때, 요렇게 말입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좋은 관계의 유지가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필요하다고 믿는 대상이 있다면, 반드시 상호 배려라는 장치가 작동하는지 확인하세요. 마음을 보호하는 선을 넘어오는 사람에겐 자리를 주지 않기로 해 봅니다. 무례함을 호의로 대하지 마세요.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