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좀 치나?’
40대쯤 되면 받게 되는 FAQ 중 하나인데 그럴 때마다 저랑 잘 안 맞는 것 같아서요, 라는 핑계를 대며 그 질문을 회피했었다. 솔직히 내 대답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30대에 배움을 시작했으나 맘대로 되지 않는 탓에 몇 개월을 배우다 때려치운 기억이 강력했다. 어느 날은 한 시간을 치는데 30분은 잘 맞다가 나머지 시간은 대체 이유를 모르는 상태로 제대로 안되어서 화만 내다 왔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답답한 연습장에서 이러고 있나, 안 하고 말지. 당시에는 그런 판단이 옳았다.
마침 최근 주변에 불어 닥친 열풍 때문에 다시 클럽을 손에 잡게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뒤에도 몇 번이나 골프 치지 않겠냐는 질문과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그게 싫기도 했다. 안 하면 세상에 적응 못하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 특히 대화에서 골프 얘기를 빼놓으면 도대체 할 말 없을 것 같은 40대 아저씨들 무리의 한정된 주제는 늘 불만이었다. 골프 안 하는 사람 앞에 두고 내내 골프 얘기만 하는 분과 대화하는 시간이 참 힘들었다. 태생이 반골 기질이 있는 터라 남들 다 하면 나는 더더욱 하기 싫다는 괜한 자존심이 거부하는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마음 맞는 회사 동료들이 자기들과 ‘같이 놀려면 좀 배우라’는 등살에 떠밀려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것을 마다할 정도로 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있지만,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는 탓에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시작하여 몇 번의 스크린과 필드 라운딩을 다녀보니 골프라는 운동이 제법 묘한 구석이 있다.
우선 적당히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스포츠라는 것이다. 평소 관리하지 않는 비루한 몸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히 마흔을 훌쩍 넘기다 보면 격렬한 운동이란 걸 하기 어려워진다. 마음은 여전히 어린 나이의 언젠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던 기억에 매달려 있지만 자칫 스트레칭하다가도 허리 삐끗하는 것이 실제 상황이다. 작년엔 놀러 가서 짐 정리하다가 근육이 경직되어 며칠을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다. 무릇 운동이라고 하면 땀도 나고 숨도 차서 칼로리 소모로 지치는 느낌을 갖고 싶은데 이 종목은 그렇지가 않다. 그건 여전히 불만이다. 게다가 상상했던 라운딩의 이상적인 상황 - 공을 치고 여유 있고 즐겁게 필드를 걸으며 대화하는 - 은 절대 우리나라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실망했다. 18홀을 다 돌면 지치기는 하는데 어쩐지 운동한 맛은 나지 않는다만, 적어도 플레이 자체에 집중하는 시간이 꽤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의 샷을 위해 공을 들이는 행위, 다양한 상황에서 최선의 스윙을 위한 노력 같은 것이 주는 쾌감이 있다. 공이 잘 맞으면 원하는 대로 되어서 좋고, 안 맞으면 그게 아쉬운 대로 또 다음을 노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흔히 socializing이라고 부르는 ‘모임’의 행위가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끼리끼리의 정치적 행위처럼 느껴서 거부 반응이 있었다. 막상 여러 사람들과 섞여서 플레이를 하다 보니 그저 그 시간에 즐기는 것 이상의 무엇이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명랑 골프를 즐기는 입장에선 필드 나가서 자기 볼 치러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빠서 남을 챙길 여유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되려 각자도생의 원칙을 더 절절하게 느끼는 것이다. 내가 잘못 친 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사람 없고, 나 역시 부탁받아서 남의 볼을 쳐 줄 이유도 없다. 자기만의 플레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여전히 누군가에겐 영업의 방식이기도 하고, 사내 정치의 장일 수도 있다. 일부가 그렇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색안경을 끼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것임을 깨달았달까. 직접 해보면 한 쪽으로 치우친 편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다만 여전히 비싼 기회비용 - 시간과 돈 - 은 골프라는 스포츠가 갖는 명확한 한계로 느껴진다. 라운딩 가자는 말이 반가우면서도 부담되는 것은 맞벌이 부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누구나 이 스포츠를 하는 것이 아닌 이유로, 여럿이 있을 때 대화 주제로 올림으로써 어떤 사람들을 소외 시키지 않게 배려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인생에서 제대로 된 골프 원년이라고 부를 만한 올해, 추워지는 날씨 덕에 당분간 라운딩은 접어야 할 것 같다. 겸사겸사 초보 골퍼의 일 년을 돌아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