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렸을 적 처음 먹어 본 곶감은 꽤 딱딱하게 마른 형태였을 것이다. 겉에 묻은 하얀 분은 마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니 걱정 말라며, 먹어보라 권했던 사람이 부모님인지 할머니인지 모를 누군가를 떠올려 보았다. 불확실한 기억을 확신으로 만들 수 있는 51% 의 이유는, 덜 말라서 말랑한 곶감을 먹어 본 경험이 꽤 자라서였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둘 다 먹어 본 입장에서 덜 마른 것이 훨씬 먹기 수월하고 어째 당도도 더 높은 듯 느껴진다.
덜 마른 것의 미덕은 오징어에서도 동일하다. 정말 반만 건조했는지, 아니면 37%만 말린 건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히 ‘반건조 오징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음식은 참 당기는 구석이 있다. 버터구이까지 해 버리면 진짜 끝장난다. 딱딱하게 완전히 마른오징어를 불에 구워 먹을 땐 턱관절을 훈련시키듯 잘근잘근 씹는 맛이 있긴 하다. 하지만 한 마리쯤 금세 먹어 치울 것 같은 초반의 기세는 뒤로 갈수록 흐려지기 마련이다. 나중엔 그 짭짤함에 중독되어 질겅질겅 씹다가 물컹해지면 삼키게 되지만 이빨이며 턱이 괴로운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말랑한 글을 쓰고 싶다.
읽는 사람 이해하느라 힘들지 않게 편하게 해주는 글.
내용에 공감하도록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릴 필요 없는 글.
특히 난 말랑한 갬성의 글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있다.
노랑노랑 표지에 찍힌 작은 두 눈과 빙그레 웃는 입꼬리마저도 다정해 보이는 기분을 주는 책, <다정소감>(김혼비)을 읽다가 괜히 좌절하였다. 최근에 다시 <언어의 온도>(이기주)를 읽다가도 그랬다. 나는 평생 이런 말랑거리는 곶감 같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싶다. 평소 지향해 온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못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란 말이다. 아니 나도 분명 감성이 있는 사람이지만 어쩐지 그걸 글로 풀어내는 순간에는 감정을 적절히 덜어내야 한다거나, (내 기준에서) 말랑한 감성을 써야 할라치면 마치 해서는 안될 나쁜 짓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멈춰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안 해봐서 못하는 것은 아닐까, 못하니까 자신감 마저 잃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새해를 맞은 글쓰기 소망은, 올해는 말랑한 곶감 같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것이다. 너무 덜 마르면 곶감이 아닐 것이고 지나치게 건조되면 먹기 불편할 것이다. 그 중간을 딱 지키는 적당한 무언가를 써 보기를 희망해 본다.
(사진 출처: 마켓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