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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와 별별 잡담

by nay


아마 학교 가기 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선풍기를 틀고 주무시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어느 책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인지 모를 괴담이 문제였다. 선풍기를 켜놓고 잠들면 죽는다! 아직 어린 나이에 그걸 제대로 판단할 근거도 지식도 없는 나였기에,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시면 안 된다는 어린이의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다. 막상 팍 꺼버리자니 왜 끄냐며 다시 틀고 주무실 것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소심했던 소년은 끄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아빠의 몸을 비껴가도록 치워놓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한참을 관찰했다. 혹시 무슨 일 있을까 봐, 아빠를 살리겠다는 마음 그 하나로 말이다.


아들이 어렸을 때 - 그러니까 대략 서너 살 즈음 - 매일매일 그렇게 많이 요청한 게 있다. ‘아빠, 선풍기 그려 줘’. 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끔 아이들이 하나에 꽂히는 경우가 있다. 어른들도 그럴 때가 있으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매일 그렇게 그려달라고 했어야 할 일은 분명 아니었을 일이다. 사실 그즈음 내게는 아들의 그림 그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었다. 비단 선풍기만 그린 것이 아니다. 물놀이장 다녀오면 미끄럼틀도 그리고 사람들도 그려줘야 했다. 할머니 병문안을 다녀온 날은 병원의 풍경, 침대에 누운 할머니, 창가에 기대 구경하던 자기 자신의 모습 등등을 빼곡하게 그려줬다. 어쨌든 그럼에도 그의 원픽은 선풍기여서 하나를 그리면 또 옆에 하나 더, 그 옆에 하나 더, 그 옆에 또, 또 또 또… 그리는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같은 모양만 그리는 것이 지겨워서 나름대로 조금씩 변형을 주었다. 안 그러면 지겹고 지루해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풍기를 그려달라는 요청은 귀신같이 뚝 끊겼다. 시작에도 이유가 없으니 끝에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발뮤다라는 일본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선풍기의 소개를 보고 갖고 싶다, 정말 열렬히 갖고 싶다는 욕심을 낸 적 있다. 제품을 소개해 준 사람은 이미 당시에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유명한 <나의 시선>이란 분. 이 분의 사진빨, 말빨이 크게 차지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명성에 걸맞게 그가 소개하는 제품을 보면 소유의 욕심이 생기고 지갑을 반쯤 열어재낀다. 써보지도 않고 직접 만지거나 본 적도 없는 제품을 사진만으로 탐내 본 것은, 아이폰이나 맥북에어 같은 애플제품 빼고 처음이었다. 하지만 가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 입맛만 다셨다. 이후에 샤오미에서 정말 비슷하게 생긴 제품이 나왔길래 싼 맛에 사서 한 대 들였더랬다. 리모컨이 없다는 점이 크게 불편했지만 핸드폰 앱에서 다 조절 가능하니 그럭저럭 견디면서 쓸만했다. 사용상의 단점은 분명했으나 미학적인 나만의 기준에서 장점이 있었기에 괜찮았다. 신제품 나오면 예전 모델 싸게 파는 정책 덕분에 해마다 사다 보니 방마다 한 대씩 놓고 쓰게 되었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선풍기 앞에서 ‘아~~~~~~~’ 놀이를 즐겼는지 모르겠다. 요걸 제대로 하려면 세게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라 딱 끄고 난 뒤 속도가 줄어들 때 해야 한다. 입에서 나온 소리가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 때문에 왜곡되면서 다르게 들리는 것을 듣는 재미가 있다. 커서는 단 한 번도 그 장난을 친 적이 없다. 집에 선풍기가 3대나 있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일단 높이가 맞지 않는다(현재 쓰는 선풍기의 키가 애매하다). 예전 어렸을 때 쓰던 제품들은 대게 높이 조절이 되고, 키를 낮추면 앉아서 딱 얼굴을 가져다 댄 키가 비슷하게 맞았다. 편하게 앉은 자세에서 뭔가 하기에 좋다. 결정적으로 예전 것들은 직접 선풍기 앞에 가서 손을 써서 단추를 누르고 속도 조절이나 시간, 방향을 바꿔야 했다. 그러니 선풍기와 내가 직접 조우할 기회가, 장난이라도 걸어 볼 상황이 만들어진다. 요즘은 누워서 또는 멀리서 조절하니 만날 일이 없다. 편리하고 인체공학적일지는 몰라도 장난친화적이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선풍기 바람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더위가 언제쯤 꺾이려나 궁금하다.


놀랍게도 ‘선풍기 바람 때문에 사망설’ 괴담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여 내 아들도 비슷한 말을 하길래 아니라고 바로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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