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고 살다 보면 어떤 것을 해보고 싶다는 위시리스트가 생긴다. 그건 세계 여행이나 오지 탐험과 같은 거창하고 위대한 목표가 아니다. 딸만 가진 아빠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같이 목욕탕에 가서 아이가 내 등을 밀어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아들 아빠인 나로서는 어쩌면 그들이 평생 가도 이루지 못할 꿈을 이미 이룬 셈이다. 아들과 해 보고 싶은 나의 꿈 중 하나는 소박하게도 캐치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왠지 모르겠지만 두 남자가 야구공을 서로 주고받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아이가 어렸을 때 찍찍이 공 주고받기를 해본 적이 있으니, 크게 보면 그 꿈도 이뤘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진짜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걸 여태 못하고 있다. 대신 같이 잠깐이지만 1:1 농구 시합도 했고, 테니스 시합도, 달리기 시합도 해 봤으니 대리만족은 한 셈이다. 그래도 언젠가 캐치볼은 꼭 해볼 생각이다.
도서관에 대한 기억은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도서관 경험(?)은 중학생 시절이었다. 친구 따라 가 본 시립도서관을 시작으로 매주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다. 책을 읽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러 다녔던 터라 개방된 책상보다는 대게 칸막이가 있는, 보통 '독서실'이라고 부르는 자리에 앉았다. 핵심은 오전부터 부지런히 가서 좋은 자리를 맡는 것이다. 오전 내내 공부하다가 친구와 점심 사 먹고 또 오후까지 보내다 오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같은 공부라도 집에서 하는 것과 도서관에서 하는 건 분명 차이가 있다. 일단 남들 눈치가 있으니 대충 공부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는다. 긴장감을 가지기 때문에 좀 더 작업의 집중도가 올라가고, 그러다 보면 공부량도 늘고 효율도 좋다. 그리고 남중 남고를 다녔기 때문에 뭔가 합법적으로 그리고 건전한 목적을 핑계로 또래 여학생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어느 자리에 예쁜 애가 있다더라 하면, 얼굴이라도 한 번 볼까 싶어 괜히 옆자리로 지나가기도 했다. 게다가 믿기 어렵겠지만 (...) 고3 힘든 시절에 같은 학원 다녔던 후배 여학생이 몇 번 자리에 두고 간 응원의 쪽지와 음료 덕분에 기쁘고 설렜던 기억도, 나의 도서관 인생에 있어 큰 추억이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덕분인지 94년에 무사히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문에서 부터 백양로를 따라 쭉 들어가다보면 왼편에 중도(중앙도서관)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도서관 자리 잡기는 대학에 와서도 여전했다. 중도에서 소위 짱박혀 있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은 고등학교 때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특히 중간/기말 고사 기간은 새벽부터 줄을 서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어렵게 자리를 잡고 시험 준비를 하면서 밤 늦은 시간, 바깥 한 켠에서 담배 피던 복학생 형들이 교과서를 몇 번 봤는지 서로 견제 아닌 견제를 하며 웃고 떠들던 밤공기가 기억 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90년 대의 중도는,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하는 학생들을 잡으러 뛰쳐 들어올 수도 있었던 장소로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아들이 자주 보는 유튜브 채널 중에 <서울대 쌍둥이>(줄여서 서쌍)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서울대에 입학한 쌍둥이들이 - 이제는 학원 선생님인데 - 학생들에게 공부에 관한 다양한 조언을 해준다. 교육에 관심이 높은 엄마가 엄선한 추천 채널이다. 어느 날인가, 아들이 이제 도서관에 가야겠다고 한다. <서쌍>이 그리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녀석은 어쩐 일인지 엄빠가 하는 말은 좨 듣지도 않는데 꼭 남이 하는 말은 진리요 금율인 것처럼 따른다. 우리가 그렇게 가라고 할 때는 무시하더니만. 집 근처에 있는 공공도서관을 가기로 했다. 주 중에는 힘드니 일요일 아침에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누구랑? 바로 나랑.
생각 같아서는 친구랑 같이 다니면 좋겠는데 그건 또 싫단다. 아내는 애만 두고 오라지만 열심히 공부하려는 마음을 먹은 아이의 곁에서 아빠로서 책을 보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함께 마주 보는 곳에 내 자리를 같이 마련했다. 예전에 내가 다니던 독서실 구조는 아니라서 사방이 뻥 뚫린 개방형 책상이 조금 낯설긴 하다. 첫날은 도서관에 오는 행위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맨 위층에 있는 카페에서 달달한 음료도 하나 사주었다. 뭔가 기분 좋은 경험을 시켜줘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학생 시절 이후에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행위 자체가 참 오랜만이긴 한데 오잉 나랑 찰떡이다. 요즘 말로, '어 나 이런 거 좋아하네?'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제공하는 특별한 공기와 분위기가 익숙하기만 하다. 집에서 짬짬이 책을 읽을 때의 어수선함과 쉽게 떨어지는 집중력도, 도서관에 오면 확 달라서 독서 행위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 중에 분명 공부가 있었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중이다.
일요일 아침에 누릴 수 있는 늦잠, 여유라는 이름의 게으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단점 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노력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두 남자가 비워주는 휴일의 오전 시간은 아내의 심리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줘서, 그녀는 우리가 도서관에 가 있는 오전 시간을 가장 반기는 중이다. 분명히 처음엔 아이만 보내고 자기는 와, 이랬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말이 쏙 들어갔다. 누구나 자기만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아들과 일요일 아침이면 도서관을 함께 가는 아빠가 되었다. 아이와 해보고 싶은 위시 리스트에는 분명히 없던 것이었는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한 주의 루틴이 되어 가고 있다. 몇 번 다녀보더니 아들은 학습능률이 올라서 좋아한다. 진작에 다닐 걸 그랬단다. 그리고 싫고 좋음이 얼굴에 바로 드러나는 나 이기에, 내 표정을 그동안 면밀히 관찰한 아내 말마따나 이제는 도서관에 가는 일요일 아침이 내게 더 설레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내 공부하는 시간도 좋지만 아들과 함께 만드는, 상상도 못했던 '도서관과 나'의 새로운 추억이 반갑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