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읽고 난 주변 독자(회사 동료들이 대부분)들의 반응 중 하나는, ‘아내에게 참 잘할 것 같다’는 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속의 나는 세상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의 반응은 이렇다.
‘(당신) 너무 미화된 거 아냐?’
2. 삶은.. 현실이란, 퇴고를 끝낸 글처럼 다듬어져 있지도, 아름다움으로만 가득 차 있지도 않다. 매일매일 조금의 짜증을 내기도 하고, 뿜어져 나오려는 화를 가슴에 품고 삭이기도 한다. 어제는 반찬을 만드는 아내를 도우려고 오이를 썰다가 조각을 바닥에 떨궈서 한 소리 들었다. 도와줘도 뭐라고 한다. 하지만 참았다. 왜냐하면 칼질 중에 섬세하지 못한 것이 있었고, 무엇보다 해달라고 부탁한 오이무침을 기꺼이 만들어주는 아내가 고마웠기 때문이다.
3. 아이고, 이렇게 또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 셀프 이미지를 만든다. 뭐 어때, 내가 쏟아내는 글이니까 당연히 ‘나’ 중심의 세계관일 수밖에 없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지만 적어도 내 글에서만큼 주인공은 바로 나다. 그게 아니꼬우면 각자 자기중심의 글을 쓰면 그만이다.
4. 좋은 리더가 되려면 다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고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를 훈련한다. 때로는 강요받으면서 자의 반 타의 반 행동하지만 결국 돌아서면 생각이 나로 향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실수하는 동료와 일을 하려면’이라는 제목의 비즈니스 기사를 읽다 보니, 대의를 내세웠지만 알게 모르게 회사 동료를 비난한 모양새가 된 일이 하나 생각났다.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아 – 또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 이미지에서 어긋나는 것 같아 – 마음이 불편해졌다.
5.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스스로 꽤 별로인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적이 있다. 외부 강연을 가던 길이었다. 마음이 조금, 정말 조금 바빴고 휴게소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 앞사람이 키오스크에서 결제에 실패하고, 뒤돌아서 내게 ‘왜 이런지 아느냐’며 물은 뒤, 다시 한번 하겠다고 했다. 나도 초행인 길에 어찌 알겠냐마는, 어쩐지 IC chip이 망가진 것이 아닐까 의심되었으나 해보시라 했다. 두 번째 역시 실패였다. 바쁜데 왜 내 앞에서 하필 이런 일이 있나 싶어 짜증이 났다. 다른 카드로 하던지, 아니면 아예 뒤로 물러나 뒤에 있는 내게 기회를 주던지. 불현듯 뒷사람이 다가가 마그네틱으로 긁도록 도와주었다. 사건은 해결되고 나도 주문을 할 수 있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결제가 안되어 당황하던 그를 대하는 무례한 태도와 짜증 섞인 눈빛의 내가 갑자기 느껴져 부끄러웠다. 그저 익명에 기대어 퉁명스럽게 대했던 것이다. 성찰 가득한 글로 가득한 내 브런치스토리 속 자아와 영 거리감이 먼 모습이었다.
6. 현실의 나는 상황에 따라 비굴하고 불친절하고 이기적이고 날 선 사람이다. 글 속에서 치장된 괜찮은 남편이자 아빠이자 회사원인 나도, 내가 맞긴하다. 아내 말마따나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자꾸 그렇게 쓰고 말하고 생각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이상향의 어떤 존재에 다가가 있을지 모른다. 그건 마치,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는 표현에 담긴 뜻처럼 자기 최면의 효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쓰는 글 속의 나는, 사실은 되고 싶은 모습의 페르소나를 담고 있는 가상과 현실의 중간쯤 되는 존재가 아닐런가,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