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끼는 후배 하나와 점심을 같이 했다. 회의를 급히 마치고 온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얼마 전 모 임원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더라며 한탄 섞인 토로를 했다.
“OO님, 이렇게 일하면 회사 오래 못 다녀”
소위 '개빡쳐서' 화가 났단다. 하지만 이어진 후배의 웃픈 말은, ‘어지간하면 너(임원)보다 더 오래 다닐 거다, 흥!’하고 속으로라도 생각하고 싶었지만 막상 꽤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 어쩐지 자기보다 실제로 더 버틸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성과를 내는 임원이었는지는 몰라도 선을 넘은 표현으로 생각되었다.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앞뒤 다 자르고 말만 똑 떼내 판단하는 것이 옳지는 않겠다만, 내가 아는 한 그 후배가 그렇게 욕먹을 정도로 일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그 임원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못해서 회사에서 잘릴까 봐 걱정되어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욕적인 언사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권력이나 위치의 재확인?
내가 들었던 가장 모욕적인 말에 대해서는 예전에 글로 남긴 적 있다.
https://brunch.co.kr/@naymore/3#comments
그때 에피소드를 회상해 보면 당시에 가졌던 당혹스러운 느낌과 분위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리고 이후에 내가 다시 겪은 다른 사람들과의 일화를 보니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란 게 자기 위치에 따라 달라지고 늘 한결같을 수는 없는 거구나 싶다. 아, 물론 좋지 않은 표현으로 상대의 감정만을 상처 입히는(입혔던) 임원을 옹호할 생각은 아니다. 좋은 리더십을 발현하는 것은 힘과 지위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후에 커피를 마시며 나는 그에게 글쓰기를 슬쩍 권유해 보았다. 내 감정과 생각을 텍스트라는 매체로 전환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미화하기도 하고, 자기변호에 빠질 수도 있으며, 쿨한 척, 괜찮은 척 각을 잡을 수도 있다. 또는 감정에 충실하다 보면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만 늘어놓게 된다. 잊으려고 했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원치 않는 고통을 겪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글쓰기의 효능감은 고통스러운 과정(글쓰기 자체든, 회상의 고충이든)을 지나고 나면 어딘가 시원한 구석이 생긴다는 점에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정을 털어내게 된다. 쏟아내고 쏟아내다 보면 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허탈할 때도 있다. 이와 별개로 자기반성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이다. 반드시 글을 통해 결론에는 내가 부족했고, 그래서 난 앞으로 더 잘할 것이다와 같은 거창한 암시를 할 이유는 없다. 자기 객관화 과정을 거치면서 옳고 그름에 대해 저절로 판단이 된다. 그러므로 그저 순간의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충분한 행위이자 가치 있는 작업이다. 누구에게 보일 것을 생각하지 말고 완성도 보다 솔직함을 미덕으로 말이다.
그래서 난 그 후배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글쓰기를 자주 권하는 편이다. 돈도 들지 않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일도 없다. 여기에 더해 나에겐 익숙하지만 남들에겐 그렇지 않은 직업이라는 세계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냐? 하지만 직업적 전문성은 아무렇게나 얻게 되는 결과가 아니다. 일반적인 담론에 나만의 생각을 한 스푼 담아내면 콘텐츠가 되고 쓸모가 생긴다.
안 그래도 후배는 최근에 스레드라는 서비스를 우연히 접했다며, 여기에 글을 쓰는 건 어떨까 생각을 하고 있단다. 어떤 플랫폼이든 난 그가 조만간 글쓰기를 시작해 보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