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퇴직(voluntary resignation)은 정년이나 징계에 의하지 않고 근로자가 스스로 신청하여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말한다. 회사에 따라 '희망퇴직', '의원퇴직'이라고도 한다 (나무위키)
1.
회사 게시판에 희망퇴직 공지가 올라왔다. 15년 차 이상부터 신청 가능하고, 근속 햇수에 따라 일종의 위로금이라 불리는 보상의 규모는 달랐다. 퇴직을 고려 중인 자들의 결심을 굳힐 수 있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좋은 당근은 퇴직금과 별도로 책정되는 위로금이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을 희망하지만 회사가 챙겨주는 웃돈을 받고 갈 수 있는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소문보다 보상의 규모도 꽤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출장 기간 동안 신청을 받았다. 이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퇴직원을 쓸 생각은 없었음에도 뭔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이런 종류의 일은 소문이 빨리 퍼지기 마련. 다른 회사에 다니는 대학 친구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너는 별일 없니?”
“난 괜찮아. 게다가 출장까지 간다”
“그러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우리가 벌써 이런 나이가 되었네”
그러나 (짐작컨대) 초기에 생각보다 많지 않은 신청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일하느라 바빠서 미쳐 게시판을 볼 새도 없이 일할까 봐 그랬는지, 그도 아니면 소문도 모르고 지나가는 아웃사이더를 걱정해서인지, ‘친절하게도’ 인사팀에서 며칠이 지나 알림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당신은 희망퇴직 대상자이니 알고 있으라는 아주 간결한 내용이었다. 그건 마치 노래를 못하는 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너 음치구나 하고 알려주는 것 같은 불필요한 추임새 같았다. 나도 알아, 그러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타겟한 메일에 아니라는 걸 똑똑히 알면서도 열어 본 순간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출장지에서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그런 내용의 연락을 받는 건 특별히 별로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건너 들은 얘긴데, 어떤 팀장은 본인이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그렇게 오래 일했나’ 싶어서 충격을 받고 정말 퇴직원을 스스로 냈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불필요할 것 같던 알림 메일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기도 한 모양이다.
3.
공지가 뜨자 빠르게 계산기를 돌려보았다. 적지 않은 금액이기에 마음이 살짝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숫자는 정직해서 지금의 내 위치를 정확히 드러내 주었다. 이 돈을 받으면 당분간은 괜찮겠다는 계산이 나왔지만 퇴직 이후의 나는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해외에 있는 동료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그는 딱 보니 내가 고민할 것 같아서 전화했다며, 가능한 더 다니라는 말을 전했다. 타지에서까지 챙겨주는 마음이 무척 고마웠다.
무엇보다 얄팍한 계산의 끝에 이번 기회를 날리기로 마음먹었던 건, 짐짓 가족을 위한다는 변명이 함께였지만(아직 벌어야 할 돈이 많다…), 여전히 난 바깥에 던져질 준비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다. 40대 초반에는 넘치던 자신감, 경쟁력 같은 단어들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러지 않으려고 바둥거린다.
아직 나에겐 더 남아서 일해야 할 이유가 있다. 좋은 동료들과 상사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 버틴다는 게 미덕일 수도 있지만 혹시 내가 뒤쳐지는 건 아닌가 싶은 불안도 여전하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바깥에 나가서 부딪혀 봐야 하는데 이 따스한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여길 벗어날 용기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젠가 방송에서 ‘스스로 줄을 끊는 번지 점프’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번지점프보다 그게 더 무서웠던 이유는 자기가 잡은 줄을 놔야 할 때를 자신이 직접 정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4.
상실의 느낌이 있다. 오랫동안 회사를 다닌 까닭에 아는 사람들 또한 누적되어 있으니까. 내가 알던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보다 어릴 때, 연차도 낮았을 때 선배나 동료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별로 와닿지 않았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많이 다르다.
우리의 인연이란 언젠가 헤어질 것을 전제로 시작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하니 달갑지 않다. 요 며칠 사이 만난 희망퇴직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그들의 내면에는 다른 걱정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말마따나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희망을 안고 떠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있다.
나는 그들을 배웅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여전히 켜져 있는 모니터, 내일 아침 회의 일정이 잡힌 캘린더. 그들이 선택한 용기와 내가 선택한 안전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아직도 줄을 놓지 못한 채 매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