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 시(詩)
거실 구석 미니 책장에 오래전에 사두었던 시인 문정희 님의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를 꺼내 들었다.
시인은 쉬운 언어로 자연과 일상에 서정성을 입혀 시를 탄생시키는 좋아하는 시풍이기에,
가끔 호박 숭숭 썰어 넣은 칼국수를 해 먹고 싶은 것처럼,
책장에 꽂혀 있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과 함께 가끔 꺼내 읽는 시집이다.
그중에서도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란 시와 '부부'(시집 '다산의 처녀')란 시를 읽을 때마다 허파에 바람 빠지 듯 실... 실 웃음이 난다.
달고나 같은 관계에 쉬운 언어로 시를 피워낸 것이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중략)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를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 문정희 님의 시 '남편' 中 -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다.
- 문정희 님의 시 '부부' 中 -
문정희 시인은 최근 쓴 신작 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출판 아침달)"에서 시를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연의 비명소리'로 이야기했고, 또한 작품을 쓰는 비결에 대해 '좋은 가르침이나 이론서에서 배운 것들을 모두 던져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때로는 그것들이 다 도움이 된다, 억지로 쓰지 말고 쓰고 싶은 충동이 일 때 써야 한다'라고 했다.
자연의 비명소리를 쓰고 싶고, 억지로가 아닌 매일매일 쓰고 싶은 충동이 마구마구 일어났으면 좋겠다.
아내가 부엌에서 토닥토닥 열심히 저녁 준비 중에 있다.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란 시를 패러디(모방)해서 '그대 이름은 아내'란 시를 순식간에 써버렸다.
쓰면서도 시-일-실 웃음이 났다. 허파에 구멍 났나 보다.
<그 이름 아내>
촌수도 없다지 우린,
동네 행정복지센터 공무원의 무심한 손가락질로
키(Key) 판에 딜레이트 한 조각 때리기만 해도
가족관계증명서 관계란이 더 깨끗해지는 관계쯤 될까
수 초 만에 사라질 고무줄 같은 인연이지.
당신은 늘,
인생에서 성공만 있고 실패가 없다면
앙코 없는 찐빵, 고무줄 없는 빤스라며
실패도 삶의 일부분이라고 밑줄 쫙 강조하더니
삶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실패일까 아닐까 물음표 띄우다
겸연쩍게 웃으며 말수를 줄여갔지.
피부가 익을 것 같은 온천물에도
파전 지지 듯 몸을 지지는게 시원하다며
이제 풍덩풍덩 몸 맡기는 뜨거운 여자
삶은 계란이라며 누구와 어떤 자리라도 함께 어울려
하루 종일 수다를 즐길 수 있는
웬만한 풍파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목석같은
그대 이름은 아내.
술에 취해 거실 한 구석 짐짝처럼 누워 코를 골아도
아침에 눈 떠보면 극세사 이불로 덮어 준 우렁각시
남자 지갑에 십원 짜리 하나 없으면 쭉스럽다며
은근히 꼬깃꼬깃 5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슬며시 넣어놓는
태평양 같이 너른 등판을 가진 여자
마음속에 나이만큼 측은지심이 가득해
자는 내 모습을 내려보며 혀를 찰 부처 같아 우러러 보이는
그대 이름은 아내.
남편이 내뱉은 거친 말투와 행동들에
뭐든 엄마의 잘못인양 화를 냈던 아이들의 푸념에
푹푹 삭혀진 홍어 심장을 가진 여자
인생 뒤안길에 마주 앉아 술 한 잔 거나하게 취해 헛소리 하는
당신이 멋있어 보이는 팔불출 남편을 둔
그대 이름은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