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아가는 삶
아버지... 아버지...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사외지(잡지)에, 퇴직한 공무원이 아버지와의 추억을 그려낸 글과 아버지와 함께 찍은 누렇게 변색된 사진을 업로드 해둔 것을 보자,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불러봤네요.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가진 것 없이 살아도 호수같이 말하지만 늘 밝고 호탕한 성격이기에, 늘 비좁은 거실에 아버지 친구분이 장날처럼 북적였고, 노점에서 생선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부엌 찬장에 늘 커피와 설탕, 프리마를 채워 두었고, 아버지가 기죽지 말고 살라고 아버지 손님에게 설탕 한 숟갈씩 더 넣어 달달하디 달달한 커피를 한 대접씩 대접했었죠. 사랑 뇌물이란 걸 대접한 것이지요. 설탕이 귀할 때니까.
아버지는 부산 충무동, 부평동 깡통시장에서 폐드럼통 세척 후 새것으로 만들어 판매하던 업체의 잘난 사장님이었지만 사업이 내리막길 걸어었도, 7남매를 부양하기 위해 부끄러움도 모른 채 건축노동판으로 나섰고,
나이가 들어 노동력이 없어졌을 때는, 박쥐가죽 같은 새벽어둠에도 배낭에 한말짜리 물통을 넣고 자연이 하루를 잉태해 내놓는 약수를 가족에게 먹이겠다며 매일 새벽 앞산을 오르셨지요.
돈을 아끼기 위해 아버지는 긴 '장미' 담배를 피우셨고, 88세에 되던 해 그 좋아하시던 담배마저 끊어버렸지요.
"아버지 연세도 있으신데 이제 와서 좋아하던 담배를 끊으십니까 그냥 즐겁게 피시지"라고 하자,
"담배도 이 나이 정도 피웠으면 많이 피웠고, 엄마가 지독히 부탁하는데 엄마가 돌아가 시 전 끊는 모습 보여 줘야지"라며...,
엄마가 노환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후, 그 큰 요양병원에 혼자 보낸 게 가슴 아픈지 없는 병도 만들어 같은 요양병원에 입원을 했고, 코로나 시기 어머니가 폐렴으로 임종도 보지 못한 상태에 밤사이 하늘에 별이 되자, 그 충격에 시름시름 보름 뒤 아버지도 큰형과 형수에게 "동생들 잘 부탁한다. 서로 우의 좋게만 살아다오"라는 한 움큼 눈물을 보이시고 하늘에 별이 되셨지요.
그 사랑으로 저번 주에 7남매와 형수, 매형, 매제 등 13명이 모여 진해에서 제 철인 "굴 요리"를 배불리 먹었고,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아버지, 고맙고 사랑해요 아버지...
<아버지가 되는 아버지>
박쥐 거죽처럼 어둔 새벽
아버지는 인기척을 숨긴 채 일어나
나이만큼 색 바랜 배낭에
한말짜리 플라스틱 물통을 넣고
키 작은 앞 산 약수터로 갑니다.
꽉 쥐어봐야 빈손
몇 해 전 허리를 다쳐 건축 노동일마저 나가지 못한 그때부터였기에
익숙해진 그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고독한 앞 산의 허리를 조근조근 밟으며 헐떡임도 없이 약수터에 도착해
바가지로 한 움큼 뜬 약수로 어제 깡소주로 헐어버린 빈 속을 삭히던지
울화통을 삭히고 계시겠죠.
형형색색의 알사탕이나 심심풀이 똘뱅이 과자나
할머니 제사상에서나 볼 수 있는 먹으면 누런 똥이 나온다는 황금빛 바나나를 사줄 순 없으나
밤 사이 산이 잉태해 준 약수라도 먹이고 싶은 무일푼의 사랑,
가난으로 웅크러진 어깨라도 펴주기 위해
큰 말통과 자존심을 구겨 넣은 해진 배낭을 메고
키 작은 동산에 아버지는 매일 약수를 뜨러 산에 올랐지요.
고단한 삶이 준 굽은 등과 비틀린 허리가 볼품없어도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고함치고,
어깨 펴고 당당해 보이려 힘쓸수록 가장이란 무한 채무에 짓눌려
검버섯 피고 이 빠져 웃는 헛웃음으로도 감추지 못한건
아버지의 들통난 가난이었지요.
아버지는 오늘도 아이 키만 한 앞산에 오를 것이고
남아 있는 삶의 높이만한 그 산은
내일, 모레, 글피 세월이 지날 때마다 낮게 더 낮게 내려갈 뿐이고
아버지와 점점 닮아가는 나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