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APEC 정상회담
보통 ‘크루즈 여행’이라고 하면 낮에는 여유롭게 크루즈 위 수영장 옆 덱체어에 누워 독서를 하고, 오후에는 애프터눈 티를 즐기다, 저녁이면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고 정찬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칵테일 한잔에 대극장에서 쇼를 감상하는 커플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굳이 이런 모습을 상상하지 않더라도, ‘크루즈=여유로움’이라는 인식은 불변하는 법칙과도 같다.
크루즈라고 모두가 같은 크루즈는 아니다. 리조트형의 액티비티가 많은 크루즈, 노부부가 많이 찾는 정적인 크루즈, 어린아이들이 특히 좋아할 캐릭터 크루즈, 기항지 관광을 위주로 짜인 크루즈 등 각 선사 별로 색다른 상품을 선보이고, 또 크루즈 안 분위기도 다르다. 그리고 같은 선사이지만, 선박 클래스(선박의 사이즈)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어쨌건 크루즈라고 하면 당연히 수많은 여행 방법 중 하나라고 여기는데, 사실 크루즈 안에서는 여행을 목적으로 온 승객들도 많지만, 많은 색다른 이벤트도 열린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결혼식
장례식
프러포즈
기업 회의
콘서트
댄스스포츠 경연대회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
게이 크루즈
정상회담
이 모든 것이 크루즈 안에서 진행된다면?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액티비티를 담당하는 포지션이 바로 Group event Coordinator(그룹 이벤트 코디네이터)이며, 바로 나의 직급이었다.
그룹 이벤트 코디네이터로 근무하면서 많은 그룹을 만났고, 다양한 이벤트를 맡았지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가 바로 2012년 9월에 러시아 블라디 보스톡에서 진행된 APEC 정상회담이다.
정상회담을 크루즈에서?
그렇다.
당시에 근무했던 레전드호를 한 달간 APEC 정상회담 주최 측이 전세를 냈으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APEC이 열리는 동안 크루즈를 호텔처럼 사용하였고, 크루즈에서 정상회담도 열었다. 크루즈 안 내부의 시설이 회의장으로 탈바꿈하고, 크루즈 안의 기존 보딩(Boarding) 시스템을 호텔처럼 바꾸는데도 꽤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각국의 정상들이 승선해 회의를 열기 때문에, 보안 강화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마 크루즈라는 휴가형 장소에서 회의형 장소로 바뀌면서 생기는 승무원들의 직무 환경 변화 그리고 생활패턴의 변화였다.
(ABAC는 APEC의 기업자문위원회이다. 크루즈 안의 극장, 라운지 등 모든 공간을 회의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크루즈에서 근무하던 모든 매니저들이 힘을 합쳐야 했고, 이 이벤트를 총괄 진행을 해야 했던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중대한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APEC 주최 측과 미팅을 하고, 미팅한 내용을 바탕으로 또 이어서 크루즈 내부 관계부서 매니저들과 미팅을 하고, 이렇게 매일 5시간의 수면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회의 준비와 이벤트로 보냈다.
(회의 중간 잠시 쉬어 가실 수 있도록, 곳곳에 Tea break station을 만들어야 했고, 매일 저녁이면 열리는 만찬 준비에 레스토랑은 분주했다. )
이렇게 한 달의 시간은 바쁘게 흘렀고, APEC 정상회담은 문제없이 '크루즈 안에서 정상회의' 라는 첫 시도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크루즈 안의 매니지먼트의 협력이 이뤄낸 결과였고, 이 이벤트를 통해 우린 더 단단해지고, 하나가 되었다. 또한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서로를 격려했다.
크루즈 안은 늘 이렇게 새로운 일들이 가득하다.
크루즈 자체가 신나는 공간이기에, 흥미롭고, 유쾌한 일들이 가득 하나, 동시에 매일이 도전이며, 수많은 어려움들과도 부딪히며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 느끼기도 한다. 끊임없이 배우고 느끼고, 노력하는 이 과정은 오로지 승객이 크루즈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라는 것을 만들기 위함이며, 그 여유로움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승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승무원들이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