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향한 사부곡(思父曲)
뜬금없이 아주 뜬금없이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의 아버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우리네 아버지다. 전쟁세대로서, 전쟁 후에 굶주림과 가난을 경험하셨던 분이셨다. 아버지는 10남매가 넘는 가족의 막내로 태어나셨고, 전쟁 이후 가난으로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 하신 분이셨다. 하지만, 젊은 날부터 열심히 일을 하시면서 살아가시다가, 어머니를 중매로 만나서 결혼하셨고, 아버지 나이 30세에 내가 태어났다. 처음 나를 낳았을 때, 우리 집 형편은 하루 3 끼니를 다 먹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말을 어머님께 성인이 되어 들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끼니를 거른 기억이 없다.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 당신들께서 굶주리셔도, 우리에게만은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하셨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내가 바라보고 생각한 아버지는 그저 무서우신 분이셨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80년대만 해도, 아직 부모님의 체벌이 있던 때였고, "장남이 바로서야 아래 둘째, 셋째도 바로 선다"는 믿음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정말 나에게만은 유별나게 엄하던 분이셨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호되게 혼이 났고, 매도 엄청 맞았다. 그때 나는 정말 아버지가 무서웠고 미웠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겨울 방학 때 집에서 탐구생활을 풀지 않고, 아버지 몰래 밖에 나가서 놀다 걸려서, 속옷 바람으로 집 밖에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속옷 차림이라 부끄럽다는 생각보다, 추워서 얼어 죽지는 않을까 무서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외에도 정말 여러 가지 일들로 아버지께 혼이 났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유별나셔서 나에게 이런 체벌을 했다기보다는 내가 어지간히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고, 위험한 행동을 했던 것 같다. 시속 80km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차량이 많은 도로에서 차가 오는데도 무단횡단을 했던 걸 생각하면, 내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만약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린 나 자신의 엉덩이를 까고 정신 차리라고 때리고 싶을 정도이다.)
내가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미 내 나이가 아버지가 나를 낳았던 나이를 한 참 지나서야 조금씩 아버지가 이해 가기 시작해서이다. 내 나이가 40대 중반인데, 이 나이가 돼서 아버지를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우리 가정을 위해 얼마나 큰 부담을 갖고 열심히 살아오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지금의 난 아버지처럼 아이는 없지만, 가정을 가져 보았고, 그 가정이 깨지면서 많은 것들에 대해 경험하였다. 그러면서,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꼈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일들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내가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난 우리 가족이 콩가루 가정이라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다투는 모습을 보였고, 사춘기 이후부터 나 또한 집 밖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가정에서 겉도는 생활을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해외 유학을 한다고 외국에 나가서 10년 가까이 살았고, 그 이후에는 서울에 와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집에 아버지께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안부인사를 드리면서 사는 게 전부인 소위 "불효자식"으로서 모범을 보이면서 살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이가 든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모습도 점점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흔히 말하는 "아버지를 무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가방끈도 짧고, 시골에서만 살아서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촌뜨기 고집불통 늙은이라 생각하며, 아버지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아버지 없이 나 혼자 힘으로만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정말 외로우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무도 자기편을 들지 않고, 고집불통의 소통이 안 되는 아버지 취급을 받으셨으니,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나이 40살 중반이 되어셔야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얼마나 우리 가정을 위해 노력하셨고, 나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는지를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중요한 기로에는 꼭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해외에서 유학을 결심했을 때, 끝까지 날 믿어주고 힘든 상황(IMF로 환율이 1달러=1,900원대였던 시기이다)이었음에도 나의 결정을 믿어준 게 아버지였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서 근무하는 현재 직장도 아버지가 날 설득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혼할 때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지만, 결혼을 제외한 모든 삶에 중요한 순간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지만,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감사함을 깨달은 어리석은 아들이 이 자리를 통해 아버지께 사죄하고 싶지만,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기엔 이미 늦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는 내가 갈 수 없는 하늘나라에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효도를 하겠다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아버지 자리를 깨달은 것은 내가 이혼을 준비하던 때이다. 결혼과 이혼을 하면서 처가댁 가족을 만나봤고, 우리 가정이 얼마나 가족애로 뭉쳐 있는 집인지 깨닫게 되었다. 물론 비교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내가 우리 가족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니,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결혼을 하고, 부부생활을 하면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가족끼리 믿음이 넘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전(ex) 아내의 아버지(ex-장인)를 보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날 사랑하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아버지의 상황이 어떠하던지, 버선발로 나오셔서 나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 주셨다. 그리고, 나 또한 내 문제를 아버지와 나누는 것이 숨 쉬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아버지와 그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서 아버지 자신이 계획하신 일에 대해 아버지의 생각과 상이하여도, 나를 믿어 주시고 응원해 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당신 자식의 꿈을 희생시키지 않으셨다. 아버지 자신의 바람이 있어도, 자식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들어 주셨던 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40대 중반이 된 2022년 8월 22일이 되어셔야 깨달은 것이다.
이 외에도 아버지에 대해 많은 깨달음이 있었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아버지.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보고 싶어요! 아주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