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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Dec 01. 2023

107

12.1

살아야 한다 



나는 이따금 아주 못된 인간이 된다. 까놓고 말하련다. 그냥 다 꺼졌으면 좋겠다. 내 모든 육감과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기억의 파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음흉한 뇌와, 지각 능력과 개념, 괴괴한 결론들이나, 꿈과 이상들, 진리나 도덕, 형이상학과 윤리와 미학들, 그 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검은 화면처럼 툭 꺼져버렸으면. 내 생에서 아예 흔적 하나 없도록 사라졌으면 좋겠다. 가만히 있어도 가만히 있는 것 같지 않은 조급함이나, 끊임없이 과거의 망망대해로 나를 밀려나게 하는 불안감들, 모든 불완전함, 불가해함, 고뇌의 발작들, 완벽한 시스템이나 헛소리들, 문학적 처세와 전지적 작가 시점, 그리고, 가장, 더러운, 말, 인간들의 말들을. 냉소, 위악, 비관적, 염세적 사고, 미적 기준과 혐오의 기준, 만물의 이면을 먼저 지각하고 지레 소스라치는 참혹한 허무주의. 그리고, 사랑, 행복, 희망, 다정함, 유순함, 아름다움, 선함, 즐거움, 다짐, 신념, 그딴 게 도대체 다 무슨 소용인가? 도대체 무슨 의미 같은 게 있길래 나를 이렇게 죄어오는가. 


인정한다. 나는 지금 격정적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시원하다. 여름밤 해변의 바닷바람 부럽지 않다. 어디에도 말하지 않은 내 오랜 결핍이 깨끗하게 씻겨나가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이 상념과 허풍에 부끄럼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지금 정직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인간으로서 그 누구보다 정직하다. 나는 지금 여기 있고 싶다. 귓전에 사근거리는 피아노 소리만을 고요히 듣고 싶다. 제발 철저히 혼자 있고 싶다. 나는 혼자 있어도 혼자 있지 못하는 인간이다. 내 지리멸렬한 뇌는 끝없이 사유라는 명목으로 무언가를 비집고 헤집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 손과 승모근은 금방 팽팽하게 수축된다. 이건 인문학적 산책이 아니다. 이건 그저 발광일 뿐이다. 나는 이 발광을 즐긴다. 이럴 때면 꼭 미치광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지금 쇠약해지고 있다. 더 극도로 쇠약해져서 완벽히 텅 빈 곳에 있고 싶다. 지금 나는 그저 왈카닥 눈물이나 쏟아버리고, 시원한 물 한 잔과 함께 생에 처음 들이마시는 듯한 공기를 온몸 가득 채우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내 황폐한 눈은 어째선지 말랐고, 나는 지금도 시계를 훔쳐보면서 오늘 할 일을 계산하고 있으며,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싹 뒤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가까스로, 이 자폐적인 글을 쓰고 있다. 무의식이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셈을 할 수 있다면, 내 심장은 바로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렇게 쓰면서, 고통을 소상히 말하거나 과장되게 해서, 나를 보존시킬 수도 없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그 말조차도 나는 제대로 발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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