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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Dec 03. 2023

109

12.3

짝사랑


몇 해 홀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일이 있다. 상념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입술이 굳게 닫히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는데, 그 버거운 박동마저 좋았던 시절의 일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애의 근처를 서성이는 일이었다. 소심한 사람의 처방법이다. 아니, 처방은 아니다. 자존의 빈곤으로 인한 균열을 겨우 한 귀퉁이 메웠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당시에는 그게 가장 안온한 처신이었다. 열렬히 감정을 누르고 일부로 마음을 부정하며 이제 나에게 남은 그 어떤 기대도 소멸되기를. 그것을 목 빠지게 바라는 마음 밖엔 할 수 없었던 시절. 나는 상실과 파괴를 얻었고 후회와 허무와 놀았다. 기대는 그렇게 두려움이 된다.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운 매일이 쌓이고 쌓여 있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인간의 하릴없는 비애다. 아, 그 궁핍한 허영심. 차가운 마음이 전하는 섬뜩한 냉기를 느끼며 나는 멀어지지도 다가가지도 못한 채 다만 붉은 고독만 지킨다. 내 입속은 너무 미끄러워, 하루에도 수없는 말들이 축축한 기도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말은 고여서 해묵었다. 나는 진심을 발음할 용기나 결심은커녕 삼켜 넘겨버린 말을 어떻게 잘 소화할까를 먼저 생각했다. 초라하고 급급했다. 당연히 소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묵은 말들이 퀴퀴하게 썩어진 채로 몇 해 방치되었다. 말들은 눈을 감아도 보였다. 심장 쪽으로 쪼르르 되돌아간 진심들은 바큇자국을 남겼다. 한 번 다져진 길 위를 지나는 편안함은 안일함으로 변모했다. 나는 어언 진심을 꿀떡 삼키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야말로 황홀한 재난이었다. 영혼은 순수할수록 많이 다친다. 계속 다치고 다치다가 무감해지면, 그때 영혼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생각을 할수록, 그렇게 성숙해지기도 하고, 그렇게 빛과 멀어져 간다. 계절이 구름처럼 더디고 무심하게 지나갔다. 마음과 구름은 닮았다. 희끗하지만 분명하게, 나는 커지고 커지지만, 그 무엇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 애가 웃으면 자주 가슴이 아팠다. 하루는 뒤늦게 도착하는 어떤 편지처럼 무엇인가 가슴에 쿡 박혀왔다. 그곳에는 ‘후회를 떠안고 살 운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들만 사모하는 나는, 진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나의 뜨거운 패배를, 고이 접어 넣는다.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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